[제주도민일보 최지희 기자] 제주도가 지난 2021년에 제정한 '오름 보전 및 관리에 관한 조례'는 제주의 대표 자연유산인 오름을 체계적으로 보전·관리하겠다는 제도적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조례는 제도적 명분에 머물고 실질적인 정책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지난 18일에 열린 ‘오름 원형보전 및 관리 정책방향 모색 토론회’에서는 조례의 실효성과 집행 체계에 대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현재 제주에는 총 368개의 오름이 존재하며 이 중 약 76.6%인 282개가 사유지다. 이는 공공이 보전과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토지 소유권 문제는 경관 회복이나 생태 복원 사업의 실행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에 대한 명확한 대응 체계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조례의 구조적 문제도 함께 지적된다. 제2조에서는 오름을 ‘용암구, 함몰구 등으로 형성된 독립 화산체’로 정의하고 있지만 지형학적으로 오름에 포함되는 침식잔류산체는 빠져 있다. 과학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면 그 위에 세워지는 보전 정책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조례 제15조는 오름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관리하기 위한 정보센터 설치 및 운영을 규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관련 기관이나 시스템은 전무하다. 제16조 주민지원사업 조항 또한 별도의 독립 예산 없이 다른 사업에 통합되거나 형식적으로만 운영되면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조례는 있으나 기관도, 예산도, 시스템도 없다"는 토론회 발언은 현실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정책 방향을 두고 지역 사회와 환경단체 간의 입장 차이도 뚜렷했다. 일부 주민과 언론은 수목으로 가려진 조망권 회복과 마을경제 활성화를 위해 경관 회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환경단체는 이미 산림 생태계로 안정화된 오름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생태적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경관 중심의 접근과 생태 보전 중심의 접근이 충돌하면서 정책은 방향성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오름은 단일한 가치로 설명되기 어렵다. 지형학적 특성, 생태적 변화, 마을 공동체의 삶,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다. 이러한 복합성에도 불구하고 조례는 획일적 기준만을 제시하고 있어 갈등을 조율하거나 정책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오름에 대한 정의는 지형학적 기준에 따라 재정립돼야 하며 침식잔류산체를 포함한 명확한 분류 체계가 필요하다. 사유지 문제는 협약 기반의 공공관리 모델을 마련하거나 필요 시 매입 및 공동관리 방식을 통해 조정 가능한 체계를 갖춰야 한다.
정보센터 설치와 오름 통합 데이터베이스 구축도 조속히 이행돼야 하며 이를 통해 관광, 교육, 연구, 보전정책을 연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또한 지역 맞춤형 주민지원사업은 별도 예산으로 편성하고 성과를 평가·반영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조례 이행 실적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행정·주민·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협의체를 제도화함으로써 정책 거버넌스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경관 가치와 생태 가치 사이의 논쟁은 어느 하나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오름의 상태와 지역의 요구, 보전의 우선순위에 따라 개별 대응이 필요하다. 일괄적인 관리가 아닌 오름별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과학적 조사와 사회적 공감 형성이 선행돼야 한다. 시범사업을 통해 다양한 모델을 적용하고 충분한 논의와 평가를 거쳐 공공 정책의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례는 정책의 시작일 뿐이다. 실질적인 실행 구조와 일관된 철학 없이 오름 보전의 실효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제주다움을 상징하는 오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선언이 아닌 설계와 집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