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기잡이철이 지난 '테우'가 뭍에 올려진 모습이다. 애월읍 하귀리 해안인 듯하다. '테우' 위에 노가 놓여 있고 사둘대는 원형으로 조립된 채 배에 연결된 줄과 함께 노면에 비스듬히 고정해 놓았다. '테우'는 뗏목 형식의 배로 자리돔 잡기, 낚시, 해조류 채취 등에 이용했다. 길이 5m 정도의 통나무 8~14개를 나란히 붙여 만든다. 통나무의
▲ 아카마스 지죠(赤松智城)와 아카바 다카시(秋葉 降)가 제주도 민속조사를 할 때 찍은 사진으로, 1932년 이전 성산포 인근에서 벌어졌던 굿판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느 여름날 춤추는 굿판을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카메라 쪽으로 눈을 돌린 모습이다. '소미'를 포함한 심방들은 양태가 좁은 갓을 착용했으며, 여자아이들 중에
▲ 해녀는 오직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의 일부 지역에만 분포돼 있다. 어떻게 보면 제주 해녀들에게는 일하는 밭이 둘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보리를 갈고 고구마를 심는 뭍의 밭이요, 또 하나는 우뭇가사리와 소라.전복 따위를 캐는 바다 밭이다. 그래서 제주 해녀들은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곧 집의 방안이요 마당처럼 정답게 여긴다. 사진은 19
▲ 제주시 건입동의 한 주택에 서 있는 제주민속자료 1호 동자복의 1930년대의 모습을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이다. 동자복은 제주시 용담동 동한두기에 위치한 서자복과 함께 제주읍성을 서로 마주보며 지켜보듯 서 있는 석상이다. 동자복은 마을의 평안과 어로활동의 안전을 기원하는 석불로, 주변환경이 요즘과는 많이 달라 세월의 더께를 느끼게 한다. 동자복이 있던 곳
▲ 1984년 제주시 연동 남녕고등학교 부지에 섰던 제주시 오일장 곡물전 모습이다. 목도리를 머리에 두르고, 모자를 쓴 상인들의 옷차림이 두꺼운 것을 보니 겨울철 곡물전의 풍경이다. 날씨가 추웠던지 사람들이 돌담 밑으로 둘러 앉아 있다. 아마 어떤 공통적인 화제가 있는듯 상인들의 시선이 거의 한곳에 쏠려 있다. '메밀'이라고 쓴 마대가 눈길을 끈다. 주
▲ 제주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은 제주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07년 4월19일 제주군수 윤원구가 사립 의신학교를 설립한 후 1909년 12월22일 제주공립농림학교(2년제) 인가를 받고 이듬해 5월2일 개교했다. 1912년 5월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가 1920년 10월에는 제주공립농업학교 3년제로 승격한다. 사진은 3년제 제주
▲ 일제시대의 제주도산 죽세품(竹細品) 판매 모습이다. 대나무를 엮어서 아기의 키보다 조금 크고 깊게 타원형으로 만든 '애기구덕' 등이 이채롭다. 1950년대부터 철제 '애기구덕'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나무로 만든 '애기구덕'은 사라졌는데, 지금은 모두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시대 제주도의 공업은 1910년대는 생필품이나 공예품을 만드는 가내수공
▲ 1972년 4월9일 제주시민회관에서 10대 가수들과 인기 연예인들이 총출동, 제주지역 최대의 가요잔치가 벌어졌다. 제남신문사가 기획한 한라문화상 시상식이다. 사진은 이날 나훈아, 최희준 등 당대의 인기 가수들이 총출동한다는 소식에 제주시민회관 앞에 모여든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장면이다. 우리나라 10대 가수상 외에 영화부문 최우수 인기상, 최우수 신
▲ 밤새 어로작업을 마친 작은 어선들이 하나둘 서귀포 어항으로 들어오자 흰 수건을 쓰고 구덕을 든 여인들이 고기를 사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남자들이 한가롭게 뒷짐 진 채 서 있는 모습에서 전형적인 옛 포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왼쪽에서는 노를 저으며 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여름철인 듯하고, 물양장시설이 제대로 안돼 있는 것으로
▲ 조천읍 신흥리 마을 사람들이 돌을 나르며 '쉐물깍'이라는 포구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멀리 보이는 산이 함덕리에 위치한 서우봉이다. 사람들은 포구를 축조하기 위해 여자는 등어리에 가마니때기를 대고 좀 가벼운 돌 두덩이를 등짐으로 나르고, 장정은 맨손으로 무거운 돌을 옆구리에 끼어 나르고 있다. 사람이 들기 힘든 큰 돌은 기중기를 이용해 위로 들어올
▲ 전자계산기가 없던 시절 모든 계산은 주산으로 했다. 때문에 당시에는 학교에서 주산 시간이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매해 2 ~ 3회의 주산경진대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1980년도에 들어서면서 전자계산기가 나오고 모든 사무처리가 전산화되기 시작하면서 주산 교육의 열기가 시들해졌다. 사진은 1979년 무렵 제주 상공회의소 주최 주산검정시험 모습이다. '사진으
▲ 수많은 해녀들이 한꺼번에 '테왁'을 껴안고 헤엄치며 나아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좀더 먼 바다로 나아가면 그들은 자맥질해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할 것이고, 몇 번이고 '숨비소리'를 토해낼 것이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질 도중에 바다 위로 올라와 가쁜 숨을 내쉴때 "호오이~" 하고 내는 소리로, 해녀들의 힘겨
▲ 1901년 프랑스 안세화 주교(프랑스 이름은 Demange이다) 일행이 전도를 위한 순방 중 고갯길에서 잠시 휴식을 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서양인들과 한국인들의 모자를 비롯한 복장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운반 수단으로 말과 짐꾼이 동원됐다. 오른쪽 짐꾼들은 앉아 있는데, 우산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이 사진은 <사진으로 본 한국의 백년&
▲ 가운데로 관덕정 건물, 그 뒤로 사라봉이 보이는 1970년대 초반의 제주시 서문로 포장 공사 장면이다. 골재를 까는 작업에 주로 여성들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채 일하고 있다. 옷가게, 약국, 이발관, 담배가게, 접골원 등이 길 양옆으로 보인다.(국가기록원)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췌.
▲ 화사한 새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는 제주의 봄 축제인 왕밪꽃축제. 제주시 중심가인 전농로는 벚꽃거리로 도심 속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수령 20~100년생 벚나무들이 1km 정도 늘어서 있는 이 벚꽃거리는 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4월이면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붐빈다. 국내외 관광객들의 벚꽃 감상과 함께 시민들이 어우러지는 장을
▲ 1940년대 건입동 1388번지 매립지 일대에 섰던 오일장 모습이다. 뒤쪽 담장은 방파제이며, 이 방파제를 의지해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담소를 나누는 사람, 아기를 어르는 사람도 보인다. 허벅과 육지에서 들여온 듯한 유약 항아리도 보인다. 오른쪽이 사라봉 자락이다. 제주시 오일장은 관덕정 광장 → 측후소 앞 → 탑동 → 시민회
▲ 1966년 해외 홍보를 목적으로 한 문화영화 <제주도>를 제작하기 위해 도내 해안가에서 해녀들을 촬영하고 있다. 제주도의 전통민속과 자연풍광 등을 담은 이 영화는 김학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35밀리 영화로 제작됐다. 1962년에는 미공보원 영화제작소가 <신비의 섬 제주도>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1963년에는 문화공보부가
▲ 지금은 복개된 병문천 모습이다. 병문천은 산지천, 한천과 함께 제주시내로 흘러내리는 큰 하천 중 하나다. 복개되기 전 서문다리 아래는 작은 시장이 서기도 했고, 여름철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노인들의 휴식장소가 됐다. 이 사진은 옛 서문다리 위에서 찍은 것으로, 계곡 하류지역은 하상정비작업을 마쳤는지 하천바닥이 잘 정리돼 있다. 계곡 한편에서 아이들이
▲ 당이 차려진 곳에서 심방이 작은굿을 행하는 모습이다. 밥.과일.술 등 제물을 차려놓고 심방이 쌀알을 던지면서 굿을 주도하는 가운데 여러 아낙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뒤의 돌담에 '십자가와 함께 주 예수를 믿으라'는 문구가 이채롭다. 무속신앙을 배격했던 기독교인의 행위로 보인다. 제주도 무속의례는 그 규모에 따라 우선 굿과 비념으로 나눈다. 굿이란
▲ 작업 복장과 작업 도구를 갖춘 두 해녀가 갯바위에서 활짝 웃고 있다. 홍보를 위해 포즈를 취한 것으로 보이는데, 1957년 7월21일 촬영한 사진이다. 물질할 때의 작업복인 하얀색 '물소중의'와 '물적삼'을 입고, 머리에는 '물수건'과 눈알이 두 개인 '족세눈'을 착용했다. 박으로 만든 '테왁'과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두는 '망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