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곳곳 보수단체 제주4.3 표지석 ‘폭도’ 명시
내년 제주4.3 70주년 화해·상생·전국화에 ‘찬물’

한림지서 추모 표지석.

내년이면 제주4.3 70주년을 맞는 가운데 화해와 상생, 전국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내용을 담은 표지석이 도내 곳곳에 세워져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서울에 거주하는 배수진씨는 SNS에 올라온 표지석 사진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표지석에는 제주4.3을 폭도가 일으킨 사건으로 규정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4.3정립 연구유족회’ ‘제주4.3경찰유족회’가 세운 표지석. ‘제주4.3정립 연구유족회’는 도내 대표적인 보수단체로 평가받고 있는 단체다.

‘한림지서 추모·표지석’이라는 제목으로 세워져 있는 이 표지석에는 “이곳 한림리 1367-2번지는 4.3당시 제1구(제주)경찰서 한림지서 터이다. 1948년 4월3일 오전 2시 폭도들은 한림지서를 습격, 큰 교전이 없어 지서안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김OO 순경(경위 추서)이 숙소에서 폭도의 공격으로 사망하고 경찰 2명과 우익단체원 6명이 각기 다른 곳에서 잠자다 기습으로 부상 당했다”고 적혀 있다.

이어 “5월14일 오후 1시 한림 오일장이 서는 날 대낮에 폭도 90명이 습격한다는 정보를 얻은 지서는 제주경찰서와 모슬포 9연대에 긴급 응원 요청을 하고 대비하고 있었다”며 “교전 중 제주읍에서 응원경찰에 이어 9연대도 도착하여 추격전을 벌여 폭도 5명을 사살했다”고 명시돼 있다.

또 “폭도들은 오후 3시 재공격, 망루에 있던 강OO순경(경위 추서)이 전사했고 면사무소가 불탔다. 이날 새벽 폭도들은 명월리에서 전 면장 부인을 살해하고 면직원 등 7명을 납치해 살해했다”며 “8월 19일 협재리에서 지서장 등 경찰관 4명이 폭도들의 기습공격을 받아 교전 중 지서장 이화영 경사(경감 추서)는 전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표지석 사진을 본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배수진씨는 “광주 5.18항쟁보다 제주4.3이 훨씬 더 오래전에 일어났고 피해규모가 더 큰데 역사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제주4.3을 모른다”며 “특히 광주 5.18항쟁은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비롯해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항쟁’ 또는 ‘민주화운동’이라고 알고 있는 반면 제주4.3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말마따나 ‘아는 사람만 아는 역사’”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역사 교육이 잘 안된 육지 사람들은 이 표지석을 보고 진짜 ‘폭도’라고 오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제주는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곳인데 이런 표지석이 곳곳에 세워져 있으면 4.3이 진짜 폭도들이 일으켰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또 “제주4.3은 민중들이 일으킨 ‘항쟁’성격이 강하다고 알고 있는데 ‘폭도’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라고 반문한 뒤 “국가가 도민을 학살한 사건에 폭도라고 하는 건 말이 안된다. 내가 제주도민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제주에서 이러한 표지석을 그대로 두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모순이 납득이 안된다”고 말했다.

한림지서 추모 표지석.

이 표지석은 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대한민국 특수임무유공자회,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제주도재향군인회,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부, 자유논객연합, 사단법인 건국이념보급회 등이 후원해 세워졌다.

양윤경 제주4.3유족회 회장은 “이 추모표지석은 도내 12곳에 설치됐는데 불법 설치물이라고 밝혀지면 당국에서 조치를 해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다”며 “특히 이 표지석이 세워진 지역 주민들이 항의도 했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주4.3유족회는 4.3당시 24곳 경찰지서 가운데 피해를 입은 서귀포시 남원읍 옛 남원1리사무소 인근 도로변, 삼양, 조천, 함덕, 성산 등 12곳에 이같은 표지석이 세워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제주도 관계자는 “관련된 내용은 이미 알고 있다. 근데 그 표지석에 도민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누구하나 가지 않은 곳에 세워진 표지석일 뿐”이라며 “4.3유족회와 정립연구·유족회와 입장 차이에서 오는 갈등일 뿐이다. 오래된 문제인데 지금에 와서 다시 논란을 붙이면 안된다. 지금은 그 보다 더 큰 배보상, 특별법 개정에 힘을 써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표지석이 세워진 땅을 보면 거의 경찰서 땅이다. 제주도가 나서서 철거를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사실상 난처하다”며 “경우회 측에서도 그 표지석에 손대지 못하게 해서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제주도는 내년 4.3 70주년을 맞아 4·3의 한을 해소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희생자 유해발굴 및 유전자 검사 사업비 13억8000만원과 4·3희생자 및 유족 추가 신고사업비 8억7400만원을 편성했다.

4·3의 고통 해소를 도모하고 생존희생자 및 고령유족들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생활 보조 및 후유장애인 간병에 30억6900만원을 편성,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

4·3평화공원의 관리·운영, 4·3길(5개소) 운영 활성화, 4·3유적지 정비 등 사라져가는 4·3 당시의 역사의 현장을 평화와 인권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3억5800만원을 투자한다.

또한 4·3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유하고, 4·3의 아픈 역사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기 위한 4·3기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사료 조사·수집에는 1억6700만원을 편성했다.

4·3역사의 승화 발전과 4·3의 전국화, 세계화를 위해 추진하는 ‘4·3 70주년 2018 제주 방문의 해’를 위한 추모위령, 문화예술, 학술, 교류협력, 세대전승 5대 분야 37개 사업에 44억8000만원을 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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