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지사 조봉호 후손 조재석, 그가 전하는 ‘조봉호’의 일대기

 <제주도민일보>는 올해 97주년 3.1절을 맞아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인물들을 조명하고자 그 후손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 '강관순', 군자금 모금운동을 주동한 '조봉호'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 주>

▲ 순국지사 조봉호의 증손자 조재석 씨.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사봉낙조(沙峰落照)’. 사라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단다. 제주의 경승지로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이니 그 경관이 어디에 비길 데가 있을까.

제주 사람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안식처로 그려지는 사라봉. 옛 사람들이 시를 읊조리며 걷던 이 곳은 그러나 일제치하 참혹했던 제주인들의 아픔까지 함께 품고 있다. 망국의 시대, 섬 곳곳을 뚫어 요새를 만들었던 일제의 흔적이 아름다운 봉우리 이면에 곳곳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를 잊지 말라는 듯이 사라봉에는 커다란 탑 세 개가 장엄히 서 있다. 제주의병, 의녀 김만덕, 그리고 순국지사 조봉호를 기념하는 탑이다.

일제에 맞서 주체적으로 일어난 제주 의병들, 가진 재산 모두를 털어 도민을 구휼한 의녀 김만덕은 제주의 은인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조봉호’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빼앗긴 나라를 위해 비분강개하며 나섰던 제주인 ‘조봉호’. 3.1절 주간을 맞아 그를 다시 기억하고자 증손자인 조재석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 당시에는 집안이 넉넉했던 덕에 총명했던 증조할아버님을 서울로 유학 보냈죠. 1902년 상경해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당시 예수교중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1904년 제주로 다시 귀향했습니다.”

떠나기 전, 그리고 돌아온 후에도 제주는 일제의 압제로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이에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조봉호는 영흥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한다.

“이토록 애를 써 가르치는 할아버님의 모습을 선교사 이기풍이 보고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추천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년만에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아쉬움만을 탓할 시국이 아니었다. 당시 서울에서 공부하던 이들도 품에 태극기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제주에도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휘문고보 4학년 김장환(金章煥)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한다. 제주에서도 곳곳에서 시위의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19년 3월 21일 오후 3시, 조천리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거사에는 ‘조봉호’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그가 남긴 친필 기록으로 나타난다.

▲ [사진=조재석 씨 제공] 조봉호 지사(좌측). 그 옆 사진에는 조봉호 지사가 항일운동과 관련 직접 쓴 친필 기록이 담겨 있다.

“저희 할아버님은 ‘독립 전개의 구체적 방법’, 또 독립운동 당시 전단문들(‘이러스라 동포여’, ‘오호 경성 시민 제씨여’. ‘각성호 제1호’ 등)을 직접 필사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자료는 지금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보관 중입니다.”

이렇듯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사력을 다하던 조봉호의 충정은 ‘독립군 군자금 모금 운동’에서 빛을 발한다.

“조선독립희생회 연락원인 김창규라는 분이 임시정부 선포문 등의 문서를 들고 제주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임무는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것이었죠. 제주에도 독립희생회를 만들어 회원 1인당 2원씩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당시 쌀 1가마니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3원입니다. 2원이면 당시 큰 돈이었어요.”

이에 조봉호를 포함한 사람들은 전 지역에 걸쳐 모금운동을 진행해 나간다. 약 50일 동안 4450여명이 모금을 해 1만원이라는 거금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된다.

“하지만 당시는 만세운동 직후라 삼엄해진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군자금 모금 운동도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님도 이 때 검거됐습니다.”

결국 표면 위로 드러난 군자금 모금운동으로 조봉호를 비롯한 최정식, 문창래 등 60여 인이 검속된다. 그리고 이 때, 조봉호의 구국충절과 희생 정신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발생한다.

“할아버님은 동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신이 주모자라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도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인사는 27명, 그리고 형을 언도받은 이는 최정식과 조봉호 2인이다. 여기서 조봉호는 ‘허가를 얻지 않고 국헌(國憲)을 문란하게 할 문서를 인쇄한 행위’, ‘이를 반포한 행위’, ‘해당행위로 인한 안녕 질서를 방해 한 일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처해진다. 그리고 대구 형무소에 들어가 복역하다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4월 28일, 37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당시 할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지만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질 않았습니다. 겨우 배삯을 마련해서 가봤더니 벌써 시신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대구 형무소 주변에 혹시나 있지 않을까, 그냥 아무데나 묻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데...시신이라도 수습해 사라봉 기념비 옆에라도 묻어드리고 싶습니다.”

조봉호 지사가 옥에서 순국한 후, 조재석 씨의 집안도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혼자 되신 증조할머니는 그 이후로도 70년 가까이를 혼자 지내셔야 했다. 할머니는 어려운 가세를 일으키고자 일본으로 떠나셨다. 조재석 씨의 아버지 조태신 씨는 그 탓에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했으며 중학교도 겨우 졸업했다. 공부대신 남들보다 일찍 소를 끌고 밭을 갈아야 했다. 못다 푼 학업에 대한 아쉬움에 지금도 매일 책을 붙잡고 사신다. 그러나 어려운 삶 중에도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긍심은 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후 세대에는 잊혀집니다. 그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지요. 정부에서 독립운동가 예우에 좀 더 신경을 써준다면 아이들도 ‘조봉호’ 할아버님을 우리 할아버지라고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조봉호 지사의 애국 충정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였으니 동지들을 구하고 홀로 순직한 그 정신을 우리의 삶과 애국의 길잡이로 이어 받으리>

사라봉 기슭, 웅장하리만큼 드높은 20M의 기념비에는 위 글귀가 적혀 있다. 나라를 잃고 흘린 그 눈물, 온 제주를 뛰어다니며 독립을 호소했던 그 외침, 그 정신을 우리는 부디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제주시 한 켠을 굽어보는 사라봉 전경이 오늘따라 더욱 아득하다.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사라봉 모충사 안에 있는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조봉호지사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도민의 이름으로 1977년 건립했다. 이 기념탑 건립사업에는 도민들이 직접 나서 약 1억원의 성금을 보탰다.
 
 
▲ [사진=조재석 씨 제공] 지난 2012년 11월 조봉호 순국지사 추모비가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조봉호 일가 가족묘지에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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