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가 강관순 선생 유복녀 강길여 씨가 말하는 ‘아버지 강관순’은...

 <제주도민일보>는 올해 97주년 3.1절을 맞아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인물들을 조명하고자 그 후손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 '강관순', 군자금 모금운동을 주동한 '조봉호'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 주>

▲ 항일운동가 강관순 선생의 따님인 강길여 씨. 현재 우도에서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바닷바람이 시려도 없는 설움보다 더 시릴까. 찬 바람에 살이 에일듯이 추워도 배곯는 자식들 생각에 발길은 저절로 바다로 향한다. 남들처럼 글도 배우고, 내 이름 석자나마 제대로 써보고 싶지만 욕심이다. 그래도 바다는 배운 자 못 배운 자 차별없이 품어주니 오히려 그 품이 따뜻할 때도 있다.

자맥질로 하루에도 수십번 사선(死線)을 넘어 따온 해산물을 해녀조합에 가져가도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예전만 못하다. 묵직한 망사리 가득 해산물을 가져가도, 그네들의 저울에만 올라가면 양이 줄어든다. 저울금 읽는 법이라도 배워뒀으면 좋았을 것을. 물 안을 벗어나니 모르는 설움, 착취의 설움이 물밀듯 밀려온다.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결국 일제의 편에 선 해녀어업조합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바다가 아닌 거리로 나섰다. 1932년 1월 7일 세화오일장이 열리는 날, 그리고 5일 후 해녀어업조합장 다쿠지 도사가 면사무소를 방문한 날 담판을 짓기 위해서다. 이후로도 230여 회, 제주 1만7000명의 해녀들은 바다가 아닌 거리로 나서야 했다.

제주3대항일운동인 ‘제주해녀항일운동’,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제 수탈정책에 적극 저항했던 해녀들의 중심에는 ‘강관순’이란 인물이 있었다. 해녀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그의 삶, 행적을 유복녀인 강길여 씨에게 직접 듣기 위해 우도 전흘동을 찾았다.

“우리 아버지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나온 수재였다. 우도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어. 도사가 오면 그 앞에서 척척 건의문을 써낼 정도로 문장력도 특출했지.”

그녀의 말대로 강관순 선생은 당시 동아일보 주재기자로 활동할 정도로 우도에서 ‘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묵묵히 뒷바라지 해주는 아내는 여느 우도 여인들처럼 잠녀, 즉 해녀였다.

그 당시 일제는 해녀들이 채취해 온 해산물을 저울 눈금을 속이는 방법 등으로 계속 착취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없던 강관순 선생은 해녀들이 저울 눈금이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하고싶었다.

“일본사람들이 와가지고 조합을 만들어서 (해녀들이) 물건을 해오면 저울금도 속이고 물건 제값을 주지 않았어. 그래서 헤맬 때 우리 아버지가 피부로 느꼈거든. 우리 어머니가 물질을 했으니까. 그래서 ‘안되겠다. 농촌 여성들 계몽시켜서 공부라도 가르쳐야지 안되겠다.’ 일본 사람들한테 속지 말라고 야학소를 세워서 공부를 가르치니까 우리 어머니도 이름 석자도 쓰고 ‘두 근 반’ 나마 알아가지고... 또 국민학교를 세우겠다고 준비하고 있을 때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나서 결국 청진으로 가버리고 학교를 못 세웠다고.”

하지만 해녀들을 향한 일제의 착취는 점차 심해졌다. 우도 여성 대부분이 물질로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데 이를 착취한다는 것은 전체의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해녀들은 일제에 거세게 저항했다.

“세화리 김시곤이라는 분 등 몇 사람하고 하도리 몇 분하고 활동하면서 시외로 나갈 적에는 하도에 나가서 하고, 여기로 올 적에는 우리 어머님이 밥 해 먹이면서 활동하고 했어. 세화장에서 해녀 항일운동 일어났잖아? 우리 우도 해녀들도 갔는데, 우리 어머님네가 다 한꺼번에 모여서 배 엎어버리려고 겁주려고 하는데 장작개비로 손목을 막 때리더래. 그래도 세화까지 가서 장터날 호미들고 물수건 쓰고 수경 쓰고 해서 갔다고.”

1932년 1월 12일, 그날 제주도사가 구좌면 순시를 위해 시위 현장에 도착했다. 해녀들은 지정판매 반대, 공정 입찰, 조합비 조정, 조합재정 공개 등을 요구했고 이에 도사는 응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후 일제는 무장경관대를 보내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때 강관순 선생도 잡혀갔다.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형무소에 수감됐어. 그 때는 무명옷을 입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다 빨아놓고 다리고 해서 면회가고 그랬지. 그 때 오문규라는 어른이 우리 아버지랑 2년 반동안 옥살이를 했어. 오문규 부인이 거기 면회를 갔던 모양이야. 면회 갔을 때 우리 아버지가 해녀의 노래를 지어서 담배개비처럼 똘똘 말아서 그 노래를 전했어.”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추운날 무더운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바다 물결위에 시달리는 몸>
▲ 해녀항일운동기념비. 이 기념비에는 해녀의 노래가 4절까지 적혀있다.  


해녀들의 모진 고통을 절절히 노래하며 지낸 2년 반 동안의 옥살이를 버티고 1936년, 강관순 선생은 만기출옥을 했다. 하지만 일제의 미행이 심해 청진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선장시험에도 합격했어. 그런데 고문 후유증으로 폐병이 걸려 3년 동안 앓기만 하다 돌아가셨지. 그후 4개월이 지난 뒤 내가 태어났어. 유복녀지.”

서른 다섯의 나이로 눈 감은 아버지, 그동안 큰 딸, 둘째 아들을 잃고 아비 없이 난 딸 하나를 키우는 어머니의 삶도 녹록치는 않았을 것이다. 딸인 강길여 씨도 여덟살부터 물질을 배우고 바다에 들었다. 그리고 해녀로서의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비가 올때, 바람 불때, 날이 궂을 때는 아버지가 지은 노래가 떠올라. 물에 들때도 부르면서 나오고, 물에서 나올 때도 부르면서 나와.”

해녀들을 위해 싸우다 갇힌 아버지, 작살과 호미를 들고 저항했던 해녀 어머니, 그리고 그 딸인 강길여 씨도 물 속에서 부모의 삶을 되새기고 있다.

집 앞을 나선 우도 전흘동 포구 앞, 그 앞에 본섬인 제주가 보인다. 배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짧은 바닷길이지만 그 바다는 170여 년간 우도 해녀들의 터전이자 우도의 젖줄이었다. 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해녀들의 정신, 영원히 굽이칠 파도처럼 세대마다 이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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