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선 세 명의 보목리 사공들이 커다란 사둘을 바다로 드리우고 있는 장면이다. 수건을 둘러쓴 여자 뱃사공도 보인다. 자리돔 뜨는 방법은 산북과 산남이 서로 다르다. 산북 쪽은 사둘을 깊이 파서 나중에 당기면서 자리돔을 잡는 방식이며, 산남 쪽은 돛대를 세우지 않고 큰 사둘을 밑에 깔고 쳐서 자리돔을 잡는다. 보편적으로 사
▲ 새해가 되면 친지를 찾아 세배를 다닌다. 아이들은 세뱃돈 받을 일에 마냥 즐겁다. 사진의 장소는 1968년경 북신로 옛 제주신문사 앞길, 북초등학교 인근이다. 아버지가 앞장을 서고 뒤에 두 아이가 어머니 손을 한쪽씩 붙잡고 걸어가고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1978년 제주시 전경이다. 1974년 2월 들어선 제주칼(KAL)호텔이 제주시내 중심지에 우뚝 솟아 있다. 지상 17층 높이의 칼호텔이 건립되면서 제주시는 제주관광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고 숙박업들도 대형화, 고급화 되기 시작했다. 제주시 구도심과 신제주를 연결하는 도로 주변으로 유채밭과 보리밭, 과수원들이 길게 펼쳐져 있다. 이 당시만 해도
▲ 표선면 성읍리 정의현성 남문 밖에 위치한 돌하르방 모습이다. 이 돌하르방은 몸에 비해 얼굴이 약간 기울어진 듯하게 표현돼 있다. 태가 있는 둥그스름한 모자를 쓰고 있고 눈초리가 타원형이며, 코는 크고 입은 음각으로 표현돼 있다. 몸통은 평면성을 띠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에, 왼손은 배 부위에 놓여져 있다. 제주도지정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1971. 8.
▲ 1970년대의 애월읍 고내리 풍경이다. 1994년 복개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한 가운데를 흐르던 정천과 냇가를 걸어가는 아낙네 그리고 고내봉, 허스름한 초가집 등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내리는 고려시대 현촌(縣村)이 설치된 역사가 깊은 해안마을로, 고내봉 아래 바닷가 일대에 취락이 형성돼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
▲ 입춘이 지나고 새날이 오면 우리네 어머니들은 가족들의 새해 운세를 보기 위해 철학관 등을 많이 찾았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길거리 양지바른 곳이나 사람들 출입이 많은 곳 모퉁이에서 돗자리를 펴고 돗수가 높은 안경을 콧등에 건 노인들이 돋보기를 들고 만세력(萬歲曆)이나 책력(冊曆)을 펴놓고 새해 운세나 혼인날 등을 보아주는 장면을 흔히 볼 수
▲ 1960~1970년대 제주 해녀의 모습이다. 물질을 하기 위해 현장 인근에 도착한 해녀 둘 가운데 한 사람은 테왁과 망사리가 들어있는 구덕 짐을 내려놓고, 다른 한 사람은 짐을 그대로 등에 진 채 한 손에는 작살(소살)을 들고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다. 해녀의 장비로는 '테왁'(부력을 이용해 해녀들이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기구), '망사리'(자루
▲ 삼성혈이 탐라국의 성지로 본격 가꾸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중종 21년(1526) 이수동 목사가 섬성혈 경내에 제단과 담장을 쌓고 나무를 심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영조 48년(1772)에는 양세현 목사가 바깥 담장을 쌓고 소나무를 심었으며 제전(祭田)을 마련, 건시대제(乾始大祭)를 봉행하기 시작했다. 고종 26년(1889)부터는 건시대제와
▲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논농사 대신 보리와 조 등의 밭농사를 주로 해 왔다. 보리 파종은 '돗거름'(돼지거름)과 부엌에서 생산한 재를 보리씨앗과 함께 뒤섞은 뒤 밭에 나가 점파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보리씨앗이 바람에 날리지 않고 보리 생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뉴월이 되어 보리가 익으면 보리를 베어 수확에
▲ 탐라 발상지인 삼성혈의 삼성사(三姓祠)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삼성혈에 처음 제단과 담장을 두르고 나무를 심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중종 21년(1526) 이수동 목사이다. 숙종 24년(1698) 유한명 목사 때는 삼을라묘가 세워졌고, 숙종 28년(1702) 이형상 목사가 사직단이 곁에 있어 삼성묘를 가락천 동쪽 서안으로 옮겼다
▲ 급증하는 제주도내 전력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 16억238만원을 투입해 제주항 동부두쪽에 제주화력발전소를 세웠다. 당시 기력(氣力)발전기 5000kw 2대를 설치했고, 1974년에 1250kw 내연발전기 6대를 더 설치했다. 제주도 전력의 주공급원이었던 이 발전소는 26년 만인 1996년에 폐쇄했다. 현재 제주도에는 제주시 삼양동의 북제주화력발
▲ 1957년 10월5일 이응준 체신부장관이 대정읍 상모리 모슬포 우체국을 시찰하고 나오는 장면이다. 이 장관은 당시 정재설 농림부장관과 함께 내도했다. 한편 1902년 8월15일 제주우체사(郵遞司)가 제주도 최초의 체신관서로 개설된 이후, 1903년 제주우편수취소로 명칭이 변경됐다가 1907년 1월1일 제주우편국으로 승격되면서 도내 우체국의 역사가 전개됐
▲ 1960년대 조와 콩 등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도리깨로 작업했다. 집 마당이나 마을 공터 또는 밭에서 타작을 했었다. 집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할 때면 타작한 곡식들이 다른 곳으로 튀어나가지 못하도록 사방으로 초석 등을 쳐놓고 타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쪽으로 마주서거나 빙 둘러서서 도리깨가 부딪치지 않게 소리를 하며 타작을 한다. 사진은 1968년 가
▲ 제주문화방송의 전신인 남양방송(약호는 NBS)은 삼도리 106번지 박태훈 사장집 3층에서 제주도내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으로 1968년 9월14일 첫 전파를 발사했다. 사진은 바로 남양방송 개국 공연 장면이다. 개국 당일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사회로 김세레나 등 인기가수와 정상급 연예인들이 출연,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제주시민회관에서 개국 축하행사
▲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도내 곳곳에서는 6월 장마를 앞두고 거둬들인 보리를 말리기 위해 집마당은 물론 동네 골목길까지 멍석을 깔고 탈곡한 보리를 널었다. 갑작스러운 비가 내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기도 했고, 저녁이면 입으로 바람을 불며 까끄라기를 털어내기도 했다. 보리를 말릴 만한 장소가 없으면 공터를 찾아 멀리 가기도 했는데, 제주시내 해안가 마을에
▲ 1982년 2월5일 c123 군용 수송기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 두 동강 난 모습이다. 이 사고로 수송기에 탑승했던 육군과 국군 조종사 등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했다. 국방부는 사고 다음 날인 6일 "대침투 작전 훈련 중이던 c123 수송기 1대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수송기는
▲ 1969년 어느날 한라산의 넓은 품에 오롯이 안긴 밭에서 아낙들이 김을 매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쪼그려 앉아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데, 꽤 큰 규모의 밭이라 작업시간이 오래 걸렸을 듯하다. 아낙들은 아마도 힘겹고 지겹게 여겨질 수 있는 김매기를 "검질 짓고 골 너른 밧듸…"하는 사대소리(검질 매는 노래)를
▲ 대한민국 공보처 제주방송국이란 현판이 걸린 이 한 장의 사진은 1950년대 초창기 건물 모습이다. 1950년 9월10일 한국전쟁기에 개국한 제주방송국은 처음 제주시 이도2동 1632번지 제주무선국 수신소 건물을 임대해 남한에서 11번째 지방 방송국으로 개국, 첫 전파를 발사했다. 당시 가청권은 제주시 중심지였고 라디오 보유대수는 200여대에 지나지 않았
▲ 좁씨를 뿌린 밭에 좁씨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말떼와 말이 끄는 '남테'로 단단하게 밟아주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이 '다랑쉬오름'이다.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1704) 민속 '답전팔양'(踏田八陽)에 따르면, "주기에 말하기를 흙의 성질은 푸석푸석하고 메마르다. 밭을 개간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몰고 와서 이를 밟
▲ 추자도에 가면 집집마다 플라스틱 제품의 대형 물통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섬 지역인 만큼 하천이 없고 지하수가 발달하지 않아 급수가 일상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젯거리였다. 추자 사람들은 급수 문제해결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써왔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 물이 바닥을 보일 때 해군함정이 물을 실어오면 집집마다 대형 물통을 들고 나와 물을 받아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