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과 신비, 꿈의 대향연을 테마로 한 제1회 칠선녀 축제가 1995년 4월1일 ~ 2일 중문 천제연 광장 일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칠선녀 축제 개막에 맞춰 꽃으로 장식된 차량이 칠선녀를 태우고 중문 시가지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칠선녀 축제는 별빛 영롱한 밤이면 옥황상제를 모시는 천상의 선녀들이 내려와 천제연의 맑은 물에 목욕을 하고 하
▲ 1946년 1월 제주항 전경이다. 물결마저 고요해 뵌다. 그러나 겨울의 항구는 스산하다. 육지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들이 시용했던 '구르마'가 보이고, 주정공장 위쪽에는 군데군데 집들이 보인다. 이 사진은 미군정 문교부장인 유진 크네즈(Eugene Knez) 박사가 조선민속학회 송석하 선생 일행과 함께 제주도 민속 연구를 위해 내도했을 때 촬영한
▲ 방사탑(防邪塔)은 해안가나 마을의 한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비친다거나, 한 지형이 허기(虛氣)가 감돈다는 풍수지리 속신에 따라 동네 사람들 공동으로 마을의 태평무사를 빌기 위해 쌓아놓은 돌탑이다. 원뿔형 사다리꼴 등으로 탑을 쌓고, 맨 위에는 새 또는 동물모양이나 장대, 사람 모습의 석상을 얹혀 놓는다. 탑의 높이는 반드시 사람의 키보다 높아야 한다는
▲ 1960년대 북쪽에서 본 모슬포 포구의 모습이다. 이 포구의 지형적 조건은 매우 좋지 않다. 수심도 얕고 화산암의 암초도 많았으며 여기에다 빠른 조류가 항구 바깥을 흐른다고 했다. 항해업자들은 이 지방 일대의 바다를 '마의 바다'라고 부르면서 이 항구에 입항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축항 안이라고 해도 암초가 많고 또 수심이 얕아서 배 밑이 물에 잠기는
▲ 간호학교의 실습장에서 실습에 열중하는 간호사들의 모습이다. 4명의 간호사들이 간호사복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현미경을 들여다 보면서 측정 결과를 기입하고 있다. 그 뒤의 진열장에는 각종 약품들이 놓여 있으며, 그 옆으로는 키는 재는 신장계가 보인다. 1968년 3월4일 제주도립병원 병설간호전문학원(교)이 개원했으며, 이 당시 간호학원생은 3년간의 교육을
▲ 관덕정과 서문로터리를 잇는 서문로 확장사업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한쪽에는 도로에 저촉된 초가를 헐어내고, 건너편에는 시멘트 고층건물을 건립하기 위한 골조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노송 몇 그루가 보이는 제주향교가 건물에 가려져 있다. 서문로는 서회선 시외버스가 다니는 유일한 길이면서 당시에는 제주중학교와 제주상업고등학교가
▲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든 아이들 모습이다. 자신 있는 표정과 휑한 표정이 교차한다. 가운데 한 학생은 V자 둘로 보이게 손가락을 포개어 손을 들었다. 앞니도 빠져서 다른 아이들한테 "앞늬 빠진 고넹이(고양이) 뒷늬 빠진 고넹이 우리 앞 담 머리고(헐고) 어디 도망 감시니(가느냐)"라는 놀림을 받았을 것 같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 해녀복을 입어야만 해녀는 아니다. 바닷가에 사는 여인들은 언제나 바다와 더불어 살아간다. 제주여인들의 삶은 늘 고달팠다. 용천수가 나오지 않아 물이 귀한 중산간마을의 여인들은 아침밥을 짓기 전에 한참을 걸어 냇가나 마을공동의 우물에 가서 허벅으로 한 두번 물을 길어 나른 뒤 밭일 하러 나간다. 반면 용천수를 비교적 구하기 쉬운 해안마을에서는 새벽에 깨어
▲ 1952년 7월7일 간호사 오명덕이 제주도의 고아원 양호실에서 김정숙 어린이의 오른쪽 팔꿈치에 생긴 피부병을 UNCACK가 소장한 공급품으로 치료하고 있다. 불안해하는 아이에게 걱정 말라고 하면서 다독여 주고 있다. 지켜보는 아른 아이들은 두려움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 보고 있다. 간호사 모자, 간호사복이 특이하다.(클리프턴 루이스 사진, 미 국립문
▲ 해녀들이 물질 작업을 모두 마치고 각자가 채취한 해산물을 뭍으로 끌어올리거나 져서 나르고 있다. 한 남정네는 해산물을 끌어올려 정리하는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앞쪽에 보이는 '촐구덕(허리에 차는 바구니)'을 허리에 찬 아이는 고둥을 잡고 있는 것 같다. 이렇듯 바다는 섬사람들의 또 다른 공동체 공간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
▲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으로 유명한 옛 제주대학 본관 건물. 일명 헬리콥터 건물로 알려진 이 사진은 1960년대 초 장시영 원장(당시 장시영산부인과원장)이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당시 제주대학 김모 학장을 만나러 갔다가 건물 앞에서 여학생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지은 지 얼마 안돼서인지 건물이 깨끗하며 건물 위쪽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
▲ 1960년대 서귀포항 모습이다. 썰물 때의 서귀부두 선석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다. 물양장의 닻 매는 말뚝에 어부로 보이는 남자가 다리를 꼰 채 한가로이 앉아 있다. 그 옆에는 고무신을 신은 노인이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그 뒤로는 웅장한 해안절벽이 항구와 대조를 이루면서 서귀포항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서귀포항 주변에는 섶섬,
▲ 1951년 3월19일 제주기독교청년회 창립총회를 마치고 회원들이 제주동부교회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했다. 말쑥한 양복 차림과 두루마기가 이채롭다. 기독교청년회의 운동 이념은 1855년 8월22일 세계기독교청년회연맹 창립총회에서 채택되고, 1955년 8월 세계대회에서 확인되었는데, 그 이념의 기준은 "기독교청년회는 성경대로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
▲ 고기잡이철이 지난 '테우'가 뭍에 올려진 모습이다. 애월읍 하귀리 해안인 듯하다. '테우' 위에 노가 놓여 있고 사둘대는 원형으로 조립된 채 배에 연결된 줄과 함께 노면에 비스듬히 고정해 놓았다. '테우'는 뗏목 형식의 배로 자리돔 잡기, 낚시, 해조류 채취 등에 이용했다. 길이 5m 정도의 통나무 8~14개를 나란히 붙여 만든다. 통나무의
▲ 아카마스 지죠(赤松智城)와 아카바 다카시(秋葉 降)가 제주도 민속조사를 할 때 찍은 사진으로, 1932년 이전 성산포 인근에서 벌어졌던 굿판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느 여름날 춤추는 굿판을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카메라 쪽으로 눈을 돌린 모습이다. '소미'를 포함한 심방들은 양태가 좁은 갓을 착용했으며, 여자아이들 중에
▲ 해녀는 오직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의 일부 지역에만 분포돼 있다. 어떻게 보면 제주 해녀들에게는 일하는 밭이 둘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보리를 갈고 고구마를 심는 뭍의 밭이요, 또 하나는 우뭇가사리와 소라.전복 따위를 캐는 바다 밭이다. 그래서 제주 해녀들은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곧 집의 방안이요 마당처럼 정답게 여긴다. 사진은 19
▲ 제주시 건입동의 한 주택에 서 있는 제주민속자료 1호 동자복의 1930년대의 모습을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이다. 동자복은 제주시 용담동 동한두기에 위치한 서자복과 함께 제주읍성을 서로 마주보며 지켜보듯 서 있는 석상이다. 동자복은 마을의 평안과 어로활동의 안전을 기원하는 석불로, 주변환경이 요즘과는 많이 달라 세월의 더께를 느끼게 한다. 동자복이 있던 곳
▲ 1984년 제주시 연동 남녕고등학교 부지에 섰던 제주시 오일장 곡물전 모습이다. 목도리를 머리에 두르고, 모자를 쓴 상인들의 옷차림이 두꺼운 것을 보니 겨울철 곡물전의 풍경이다. 날씨가 추웠던지 사람들이 돌담 밑으로 둘러 앉아 있다. 아마 어떤 공통적인 화제가 있는듯 상인들의 시선이 거의 한곳에 쏠려 있다. '메밀'이라고 쓴 마대가 눈길을 끈다. 주
▲ 제주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은 제주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1907년 4월19일 제주군수 윤원구가 사립 의신학교를 설립한 후 1909년 12월22일 제주공립농림학교(2년제) 인가를 받고 이듬해 5월2일 개교했다. 1912년 5월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가 1920년 10월에는 제주공립농업학교 3년제로 승격한다. 사진은 3년제 제주
▲ 일제시대의 제주도산 죽세품(竹細品) 판매 모습이다. 대나무를 엮어서 아기의 키보다 조금 크고 깊게 타원형으로 만든 '애기구덕' 등이 이채롭다. 1950년대부터 철제 '애기구덕'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나무로 만든 '애기구덕'은 사라졌는데, 지금은 모두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시대 제주도의 공업은 1910년대는 생필품이나 공예품을 만드는 가내수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