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편의 무시하는 교통행정…보행환경 ‘뒷전’

[좌승훈 칼럼] 올레, 느림, 생태 슬로우 시티, 간세다리(게으름뱅이) 여행, 에코힐링(eco-healing) …. ‘걷기’하면 떠오르는 제주의 이미지다. 대표적인 게 전국 걷기 열풍의 조상(祖上)이라고 할 수 있는 24개 395㎞의 올레 코스가 있다. 걷기 좋은 이 맘 때면, 영주십경(瀛州十景) 중 하나인 귤림추색(橘林秋色, 귤림의 가을 빛), 고수목마(古藪牧馬, 풀밭에 기르는 말)가 잘 녹아 있다.

어디 이 뿐이랴. 길 하나 건너면 또 다른 세상이다. ‘놀멍, 쉬멍, 꼬닥꼬닥’(놀며 쉬며 천천히) 올레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은 제주의 숨은 속살에 감탄한다.

그러나 엣 도심 보행 환경은 정반대다. 녹록치 않다. 수 십 년 전 도시계획이 된 옛 도심은 도로 폭도 좁거니와, 주차난 때문에 보행 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최근 대중교통 전면 개편 과정에서 인도가 절반이상 싹둑 잘려나간 곳도 있다.

대표적인 게 제주시 광양로터리~아라초등학교 2.7㎞ 구간이다. 중앙 버스 전용차로를 만들면서 광양로터리 인근 흥국생명 앞 인도 폭은 기존 3.3m에서 1.8m로 축소됐다.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경계석을 제외하면 인도 폭이 1.5m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제주지방법원 쪽도 마찬가지. 도로 중앙에 교통섬(정류소)을 만들면서 인도 폭이 기존 6.6m에서 3.2m로 축소됐다.

옛 도심 중 유동인구가 많은 시청 대학로 골목길도 넘쳐나는 차량들의 주차공간으로 빼앗긴 지 오래다. 보행자의 안전과 권리는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시 오라동 연미・사평마을 중심을 관통하는 연사길・연미길은 ‘최악’이다. 보행권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걷기가 무섭고 두렵다.

실제로 오라초등학교 인근을 제외하고는 보행로 자체가 거의 없다보니, 보행자들은 찻길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더욱이 최근 이 일대에 공동주택이 대거 들어서면서 교통량 증가와 함께 주차난도 가중되고 있다. 악화일로다.

제주시 오라동 연사길・연미길. 도남동에서 연동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주차난에 교통량도 매우 많은데도 보행로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있더라도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큼 시늉만 냈다.

# 주차난과 대중교통 개편・자전거도로에 잘려나간 보행환경

제주시 중앙로 사거리는 지하도상가를 건너야만 도로를 횡단할 수 있다. 횡단 수단은 단 하나, 지하도상가가 유일하다. 교통약자에게 지하도상가는 육교나 다름없다.

제주시는 2016년 8월 중앙지하도상가 개・보수 공사로 지하도를 폐쇄했다. 대신 이동권 확보를 위해 중앙로사거리 남쪽 옛 나사로병원 앞에 임시 횡단보도를 설치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 3달 만에 철거했다. 당시 이도1동 주민 1000명은 “노약자, 장애인, 임산부. 어린이 등 교통약자를 위한 건널목 마련은 행정의 의무”라며 중앙지하도상가 횡단보도 재설치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주도에 제출했다.

이 곳 횡단보도는 1990년 9월까지 3차에 걸쳐 중앙지하도상가가 조성되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곳이다. 또한 2007년 교통 약자를 위해 제주도 자치경찰단 교통시설심의위원회가 횡단보도 설치를 가결할 정도로 필요성은 충분히 검증된 상태였다.

그러나 행정은 지하・지상상가의 갈등과 대립, 교통흐름 등을 내세웠고, 끝내 보행권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에 대해 주민 편의보다 ‘지하도상가 눈치 보기’라며 행정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있다.

# 제주지역의 교통약자를 위한 복지지수, 전국 '최하위'

사실 최근 국정감사에서 지적된 바, 제주지역의 교통약자를 위한 복지지수가 전국 최하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의 ‘교통약자 이동편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제주지역은 ‘2016년 통합 교통복지지수 평가’에서 전국 17개 시・도 중 16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는 제주의 교통약자에 대한 이동편의 수준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고령자와 어린이 사고율이 매우 높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도시재생사업 차원에서 만든 삼도2동 주민자치센터 인근 문화예술의 거리도 사정은 마찬가지. 중심축인 관덕로 4길・6길, 중앙로 12길 일원은 길 양 옆 불법 주차로 인해 보행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보행 환경을 개선하겠다며 애써 만든 보도블록 포장이 민망할 정도다.

행정은 목표와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도시재생의 본질은 정주권(定住權) 개선에 있다. 정주권은 주민들이 일정한 곳에 머물러 살 권리다. 문화예술거리 조성이니, 관광객 유치는 수단일 뿐이다. 수단이 본질을 위협한다면 주객전도(主客顚倒)나 다름없다.

접근성 개선을 위한 주차난 해소는 유동인구 확보와 함께 옛 도심 활성화의 관건이다. 맘 놓고 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보행권이 확보돼야 문화예술거리도 살릴 수 있다.

제주시 중앙로사거리 북측 횡단보도가 설치됐던 곳. 교통 약자에게 도로 횡단 수단인 지하도상가는 육교나 다름없다(사진 왼쪽). 또한 최근 대중교통 개편에 차도로 잘려나간 광양로터리 북측 인도. 그동안 옛 도심 인도는 주차난과 도로 확장, 자전거도로 개설 등으로 보행환경이 계속 악화돼 왔다.

# 차량 정체 해소 아닌, 사람 중심의 교통정책 전환 절실

보행 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제3조는 보행권의 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의 안전 보장, 질서 유지 및 복리 증진을 저해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국민이 쾌적한 보행환경에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보행할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 진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는 11월 11일은 정부가 정한 보행자의 날이다. 11은 사람의 다리를 의미한다. 교통수단으로서의 보행을 인식시키는 것이 보행자의 날의 목적이다.

차량의 소통만큼 주민들의 보행권 확보도 중요하다. 분명한 것은 안전하고 쾌적한 보행권 확보가 위협을 받아서는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좌승훈 주필.

지금 제주도는 대중교통 전면 개편과 함께 걷기 쉬운, 걷고 싶은 보행자 중심의 도로·교통정책 전환이 절실하다.

보행환경 개선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다. 이를 위해 도심지 보행환경 저해 요인이 무엇인지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로드 체킹(Road Checking)’반의 운영도 대안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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