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봉쉡1·2호점 사장 김봉희씨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거 할래요”
건강 악화되며 삶의 가치관 ‘흔들’…제주 바다·돌담길·오름으로부터 ‘치유’

▲ 지난해 1월 제주에 입도한 봉쉡1·2호점 사장 김봉희씨(40).

“가슴이 답답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고 하더라고요”

결혼식을 3주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날아들었다. 암 선고를 받은 것이다. 청첩장까지 보낸 상태에서 식을 미룰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식을 치렀다. 하지만 당장 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 해외로 신혼여행을 떠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로 떠나왔다.

불과 2년 전,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과장으로 근무하던 김봉희(40)씨에게 벌어진 일이다. 총각 시절 15번이나 왔던 제주였지만, 한 번도 이곳이 삶의 터전이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만큼 봉희씨에게는 육지에서의 ‘열정적인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에 돌아가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봉희씨의 가치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이렇게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허무함이 몰려왔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하는 억울함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돌아켜보니 지난 날의 삶의 잣대는 ‘좋은 직장’, ‘승진’, ‘연봉’이 전부였다.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오늘을 견디게 했다.

그런데 이미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떠올려보니 그들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갖고 싶은 걸 다 이뤘는데도 왜 행복하지 않은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위와 돈은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죽음’ 앞에 선 봉희씨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에 이르렀다. 치료를 마치면 무작정 제주로 떠나겠다고 말이다.

다행히 암이 전이된 곳이 없어서 종양은 무사히 제거됐고, 봉희씨는 서울에 근무지가 있는 아내의 동의를 얻어 홀로 제주로 향했다.

2013년 1월, 입도한 봉희씨는 제주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하염없이 월정리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따라비오름에 오르기도 하고, 올레길도 걸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돈내코 계곡, 자연이 빚어놓은 황우지해안, 돌담이 예쁜 구좌읍 한동리 등. 그는 자연으로부터 몸과 마음을 치유받았다.

“꼭 ‘올레’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아니더라도 모든 길이 아름답더라고요. 제주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졌죠”

그렇게 두 달쯤 흘렀을까,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이제 ‘떠나온 목적’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떠나기 전, 제주에 오면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자고 아내와 약속했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기꺼이 곁에 있어주겠다는 아내. 그러나 양가 집안에서는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봉희씨의 건강에 대한 불안과 ‘뭐 먹고 살래’라는 현실적인 우려에서였다.

▲ 요리에 집중하고 있는 봉희씨. 사진출처=봉쉡 방문객 블로그.
봉희씨는 가족들의 걱정과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제주에서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일들을 떠올려봤다. ‘내가 가장 활짝 웃고 있었을 때가 언제였던가’. 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혼자 살 때 지인들이 집에 놀러오면 요리를 해서 대접하곤 했어요. 내가 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유후’하는 환호성이 절로 터졌어요. 건강하고 좋은 음식을 만들어서 그걸로 친구를 사귈 때 내가 행복해 한다는 걸 깨달았죠”

그때 우연찮게 월정리에서 괜찮은 자리를 얻게 됐다. 제주에서 사귄 친구 한 명과 3월부터 공사를 한 끝에 드디어 6월 ‘봉쉡’의 문을 열게 됐다. 메뉴는 ‘해물칼국수’ 달랑 하나였다.

“크게 앓고 났더니 몸이 민감해지더라고요. 음식에 화학조미료를 쓰면 신물이 올라왔어요. 날 위해, 그리고 손님들을 위해서는 정공법으로 음식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순수 재료만으로 정성을 다해 만든 해물칼국수는 단번에 ‘맛’으로 손님들을 사로잡았다. 입소문을 타고 개업한 지 단 2~3주만에 줄서서 기다리는 손님들까지 생겼다.

처음엔 ‘흥행’이었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하다보니 많은 손님을 받기가 어려웠다. 재료값과 인건비를 빼면 마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큰 욕심은 없었지만 집안의 가장으로서 ‘대책’이 필요했다. 게다가 자리가 없어 돌려보내는 손님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

▲ 제주시 이도이동에 위치한 봉쉡2호점. 사진출처=봉쉡 방문객 블로그.

그렇게 해서 ‘봉쉡2호점’이 탄생하게 됐다. 손님들의 취향에 맞게 메뉴에 ‘회국수’와 ‘해물찜’도 추가했다. 이 과정에서 직원이 5명으로 늘었고, 약간의 빚도 생겼다. 아직은 본전치기도 못하고 있지만 봉희씨는 “봉쉡 식구들도 생기고 많은 이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선보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봉희씨는 ‘봉쉡’이 모두가 함께 꿈을 이루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배우가 꿈인 직원은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 그들의 표정을 배우고,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제주에 온 직원은 이곳에서 행복을 찾길 바란다. 봉희씨가 그랬듯이 말이다.

▲ 지난 제주살이 추억들을 걸어놓은 가게 벽면 앞에서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봉희씨.
그런데 다음 달이면 봉희씨가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무슨 일일까?

너무도 갑작스레 팽개쳐 두고 온 20대 청춘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비록 행복의 잣대에선 어긋났지만 그가 몸과 마음을 바쳤던 일들 또한 무척 소중한 일이었다. 이는 두 번째 인생을 제대로 시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얼마 전 ‘완쾌’ 소식을 들은 봉희씨는 당분간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을 이어갈 계획이다. 그러나 봉희씨는 삶의 터전은 ‘제주’라고 힘주어 말한다. 청춘을 매듭짓고 오기까지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암에 걸리기 전 나는 미래를 위한 삶을 살았어요. 미래를 꿈꾸느라 순간 순간 잃고 사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오늘을 위한 삶을 살아요. 앞으로도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거 할래요”

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대하는 봉희씨.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맛보고 싶다면 ‘봉쉡’의 문을 두드려보길 바란다. / 제주도민일보 안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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