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섬인 제주 해역에는 대마난류(對馬暖流), 황해난류(黃海暖流)와 황해냉수(黃海冷水), 중국대륙연안수(中國大陸沿岸水), 혼합수(混合水), 제주도연안수(濟州島沿岸水) 등 여러 가지 해류와 연안수에 따라 바다가 바뀌는데 계절적이 차이를 보이는 등 매우 복잡하고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봄철에는 쿠로시오 해류가 중국을 경유한다. 하지만 여름을 지나면서 제주의 해류는 방향이 바뀌어 유구 쪽으로 흐르게 된다고 한다.

특히 근해에는 난류(暖流)인 대한해류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따뜻하고 해양성 기후가 뚜렷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바다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섬을 오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했다.

제주 바다는 계절마다 바뀌는 해류와 해수는 물론, 태풍이 지나는 경로였던 것이 문제였다. 오늘날과 같이 선박과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더욱 문제였다.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시시각각 달리하는 바람에 의지하면서 깊은 바다, 심한 풍랑(風浪)을 견뎌내며 제주에 닿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배를 탄 사람들은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경우가 열에 다섯 여섯은 돼 언젠가는 바다에서 죽고 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바다를 건너다가 폭풍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 난파돼 죽게 마련이다. 하지만 바람을 잘못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거의 표류하게 됐다고 한다.

최부(崔溥, 1452-1502)는 성종 18년 11월 경차관(敬差官)의 명을 받고 제주에 근무하게 됐다. 다음해 정월에 부친의 부고(訃告)를 듣고 경항 없이 출발했다가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강한 북풍을 만나 영파부(寧波府)에 표류했다고 한다. 그해 6월에 북경을 경유해 귀국하게 됐고 왕명에 의해 표류기를 지었다고 한다.

또 장한철(張漢哲, 1744-)은 영조 46년(1770)에 과거에 응시하려고 상경하다가 유구에 표류해 1년만에 귀환하면서 표해록(漂海錄)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영조 39년(1736) 문과에 급제해 대정현감 등을 역임했다.

반면 광해군 3년(1611) 3월 유구국 왕자(王子)가 제주도 표도했다. 그런데 못된 관원(官員)에 의해 살해됐다.

유구의 왕자는 광해군 원년에 일본 사쓰마(薩摩藩) 도주(島主)가 자신의 나라를 침공해 부왕(父王)을 포로로 끌고 가자 왕자 형제가 부왕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상선(商船)에 편승했다가 풍파를 만나 표도한 것이었다.

배에는 황견사(黃繭絲) 150석과 명주마노(明珠瑪瑙) 1100개가 있었다고 한다. 판관 문희현(文希賢)이 이를 탐내고 목사 이기빈(李箕賓)을 충동질해 이들을 살해해 버렸다.

이 사실이 탄로나자 이기빈은 북청으로, 문희현은 북도(北道)로 유배됐다고 한다.

속설에 의하면 유구왕자는 부왕 구명품(救命品)으로 주천석(酒泉石.물을 넣어두면 술이 된다는 돌)과 만산장(慢山帳.개어놓으면 손안에 드나 펼치면 산이라도 덮을 만한 장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희현이 이을 요구하자 왕자가 이를 바다에 던져버리자 왕자를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조 5년(1627) 9월에 네덜란드인 수부 ‘안 얀세 웰테부리’가 제주에 상륙했다. 그는 오우벨켈크호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물을 얻기 위해 선원 2명과 함께 중선으로 상륙했다가 관원에게 붙잡혔다.

그 사이에 모선은 떠나버렸고 3인은 서울로 압송돼 살게됐다. 그가 박연(朴淵)이었다.

효종 4년(1653) 8월에는 야하트호가 태풍으로 대정현 남쪽해안 곳에서 파선했다. 당시 이원진 목사는 대정현감 권극중(權克中)과 제주판관 노정(盧錠)을 시켜 가 보도록 했다. 그런데 64명 중 36명만이 생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다음 해 5월에 서울로 압송됐고 여수, 순천, 남원 등지에 분산 수용됐다. 

그 중에 하멜 등 8명이 현종 7년(1666)에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그 해 7월에 본국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우리 나라에서 억류됐던 14년간의 체험을 기록했다. 이것이 하멜의 ‘난선 제주도 난파기’였던 것입니다.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661년(제명 7년) 5월에 일본 사신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표류해 탐라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배편에 탐라의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이 타서 일본에 입조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이 당 나라를 왕래하는 길목에 탐라가 있었던 까닭에 한반도에 있던 국가들과 함께 그 왕래가 많았고 문물의 교류도 잘 이뤄졌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표류인들의 표류기와 정회의(내성시 소속 제주 거주 노비)의 일본 표류와 관련해서는 일부 표류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들 표류기는 표류 당시 상황과 이국의 문물을 기록해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서양인의 경우에 제주에 표도한 네절란드인 하멜의 표류기는 조선의 문물과 사회상을 서양인에게 전파해 준 주요한 매체가 되기도 했다. 해류의 흐림으로 이어진 바닷길의 기억을 가만 되새겨본다.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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