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척박한 곳에서의 삶은 언제나 모자랐고, 늘 가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각박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 된 도리를 실천하는 큰일에 있어서만큼은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등 그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맺어온 다양한 인연들이 찾아 서로 격려하고 도왔던 부조(扶助) 문화가 있었기에 사람된 도리의 실천은 가능했던 것입니다.

예전 혼인(婚姻)은 ‘중매(仲媒)’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허혼(許婚)이 되면 신부 측에서는 신부의 사주(四柱)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신랑 측에서 궁합을 보아 잔칫날을 택일(擇日)하고 신부 집에 막 편지를 보내면 양가의 결혼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식 전날을 ‘가문잔치’라 하여 양가 모두 친족잔치를 치르게 되는데, 신부 측에서 마련한 새살림의 가구가 신랑 집에 도착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결혼 당일 신랑은 정해진 시간에 집에서 출발하는 출제를 지내고 상객(上客:친족대표, 남녀 우인 등 포함)들과 더불어 신부 댁 대문 안에 들어가서 선후 신랑 측 친족 어른이 납폐(納幣)와 예장(禮狀)을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상 위에 놓아 인사를 올립니다. 그러면 신부 측 어른이 받아 예장을 읽어 보고 어그러짐이 없으면 ‘신랑 입실이요’하는 말과 함께 중방(신랑을 돌봐주는 신부 측의 친족)의 안내대로 신랑 방에 들어가 신랑으로서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한편 상객은 다른 방으로 안내되어 대접을 받아 끝날 무렵에는 신부 측 양부모가 들어와 사돈 간에 인사를 하고 서로 부탁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면 이날의 신부 댁 의례는 모두 끝나게 되고, 신랑은 곱게 단장한 신부를 가마에 태워 데리고 신랑 댁으로 오게 됩니다. 신랑 집으로 온 신부는 신부 방에 들어가 신부로서의 대접을 받고 끝나면 이 날의 의례는 끝이 납니다. 신부가 신랑 댁으로 올 때 신부 측 상객이나 기타 동반자도 신랑 측과 같은 예법으로 합니다.

이렇게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면 신랑 집에서는 하례객이 모여들고 온종일 축하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이날 밤 신부는 신랑 댁에 머물고 밤에는 동네 청년과 사람들이 모여 노래와 춤으로 흥겹게 즐기고, 심지어 신랑을 매달아 놓고서, 신부가 나와 빌고 술을 대접해서야 풀어주곤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식을 치르게 될 때 신랑을 대신하여 금전 지출 및 손님들을 접대하는 사람을 다로 두게 되는데 이러한 일을 맡은 사람을 ‘부신랑’이라고 하며 대개 신랑의 친구 중에 한 사람이 맡게 됩니다. 신부측 역시 ‘부신부’가 있음은 물론입니다. 사회의 흐름이 가져온 간소화로 지금은 그 옛날의 독특한 풍습들이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편입니다.

상례는 종명(終命)이 확인되면 망인의 홑적삼을 시신(屍身)에 잠시 덮었다가 지붕 위로 가지고 올라가 북향(北向)하고 주소, 이름, 나이를 부른 다음 ‘복’을 3번 외쳤다고 합니다. 장례일(葬禮日)은 보통 3~7일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상주와 장지 등을 고려하여 택일하였다고 합니다. 명당을 얻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는 집안도 있어, ‘토롱’이라 하여 임시 매장법도 이용하는 집안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마을 아낙네의 도움으로 상복을 준비하게 되면, 성복제(成服祭)를 지내고 입관(入棺)하면 상주(喪主)들은 상복으로 갈아입게 됩니다.

입관하는 날에는 사돈집에서 팥죽을 쑤어서 오기도 하였는데, 붉은 색은 귀신이 꺼려한다고 해서 찹쌀과 붉은 팥을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발인(發靷) 전날에는 일포제(日晡祭)를 지내고 문상객을 받게 됩니다. 상여(喪輿)는 동네마다 ‘골’을 조직하여 상여의 준비, 운영 등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봉분(封墳)을 쌓는 일까지 장례 의 일체를 골군이 중심이 되어 치러지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제주 사람들은 자식의 혼례(婚禮)와 조상의 상례(喪禮)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일정한 형식과 절차를 특징 지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집행하도록 함으로써 규범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할하면서 맺어온 혈연(血緣), 지연(地緣) 등의 많은 관계는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는데도 크게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일을 당해봐야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랜 관계 속에서 맺어진 부조의 인연은 그렇지 못할 외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변방의 사람으로 남아 있도록 하는 족쇄가 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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