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섭
산과 산담, 발복(發福)과 안식(安息)을 염원했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모나지 않은 능선을 원추형으로 세워 커다랗게 보이도록 자리하고 있는 여느 오름 자락에는 검은 돌을 4각형으로 깎아 장방형(長方形)으로 두른 묘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방목(放牧)하는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기도 하고 연신 등에 붙는 쇠파리를 쫓기 위해 꼬리를 뒤적이는 모습이 바쁘게만 보입니다.

이름난 오름은 물론, 깊은 곳에 자리한 오름마저에도 방형(方形)으로 산담을 두른 묘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우리 제주입니다. 다른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게 제주 사람들도 명당(明堂)을 얻기 위해 좋은 지관을 선정해 오랜 시간을 들여 묘터를 찾아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험한 곳이라 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산터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의 서부 지역을 전부 조망할 수 있을 만할 곳으로 그 높은 노꼬매 오름 정상에도 산을 쓰고 있고, 제주의 동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월랑봉 정상 언저리에도 산은 들어있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밭머리에 무덤을 쓰는 곳이 우리 제주였습니다. 어느 지역이라 할 것조차 없이 마을을 조금 벗어난 밭이면, 방형을 산담을 두른 큼직한 묘가 밭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상(喪)을 당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기 일처럼 처리하였습니다. 물을 길어오고,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제상(祭床)과 상식(常食) 상에 올릴 음식도 준비하였으며, 나이 드신 여자들은 상주의 상복, 여상주의 너울은 물론, 복친의 두건, 행경을 만들었습니다.

상주(喪主)는 예법에 능한 집안 사람중에서 호상을 선정해 상례의 추진을 맡기면, 우선 택일과 장지를 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장막을 치고 잔치음식으로 쓸 돼지를 잡고, 관을 만들고, 골에 드는 장정들은 운구를 준비하였으며, 토신제를 지내고 개광(開鑛)을 준비하며 매장을 준비하는 등 개인이 처리할 수 없는 수다한 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진행해 가면서 상청(喪廳)을 마련하고, 지인들의 조문을 받으며 영면(永眠)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동네 여자분들이 ‘설배’라고 하는 천을 잡고 상여를 끌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웃이라는 이승의 동반자들이 망자(亡者)가 못다 이룬 꿈과 한(恨)을 이승에 남겨 두지 말고 어떠한 제한도 없는 저승에서만은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살라는 마을 사람들의 마지막 바램을 담은 진혼(鎭魂)의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 심방을 빌어 ‘온 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는 ‘귀향풀이’를 하며 이승에서 안타까움을 모두 풀어내며 영원히 안식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이 제주의 상례(喪禮)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주에서는 자손들이 발복할 명당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을 자신의 땅에 모심으로써 편안하게 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모두의 바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빚을 내서라도 밭을 장만하는 것이 이승의 자손은 물론, 저승의 조상에게도 도리를 다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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