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상이 / 제주대학교 의료관리학 교수,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 이상이

복지가 없어도 살 수 있을까. 단언컨대, 나는 복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시장 복지를 논외로 하면, 복지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가족 복지·지역사회 복지·그리고 국가 복지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 신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전인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제도적 복지를 의미하는 ‘국가 복지’ 없이도 살 수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의 국가 복지 정책이라는 것은 극빈층을 선별해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생활보호제도가 주축이었고, 사회보험은 형성기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당시에 국가 복지가 이렇게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복지가 튼튼했고, 미약했지만 지역사회가 일정하게 복지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을 포함해 4번의 대통령 임기를 거친 지난 10여 년 동안에 많은 것이 변했다. 지역사회의 공동체 복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었던 가족 복지도 대부분 해체돼 버렸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국가 복지와 경제 성장뿐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않는 한, 가족 복지가 과거에 하던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지역사회 복지도 비슷한 상황이다. 다만, 지역사회 복지는 이것을 활성화하고 지원하려는 국가의 제도적 역할 정도에 따라 장차 복지의 한 영역으로서 새로운 기능을 수행할 여지는 남겨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의 제도적 복지와 경제 성장을 중심으로 국가의 제도와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를 ‘함께 사는’ 방식으로 새롭게 짜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경제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성장을 해왔고, 고도성장도 더 이상 불가능한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는 결국 일자리의 양극화와 소득 및 자산의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소위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는 동안 국가의 제도적 복지가 많이 개선되긴 했으나 본질적으로 달리진 것은 별로 없다. 여전히 보편적 복지의 제도적 발전이 취약하고, 복지와 경제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국가의 경제사회 전략을 구사하기 보다는 복지와 경제 간의 분절적이고 대립적인 정책기조를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보편적 복지의 취약과 경제의 양극화는 만성적인 민생불안을 불러왔다. 우리네 가계는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봐 늘 걱정이다. 사는 게 불안의 연속인데, 5대 불안이 그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자구책으로 선택하는 게 각종 민간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인구 대비 ‘보험의 비중’이 가장 큰 나라가 돼버렸다. 민간보험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과 보험’ 상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주요 국가들 중에서 압도적 1위이고, 범죄가 늘고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복지와 경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기본적인 관점과 운영 전략이 잘못된 데서 기인한다. 당장 먹고 살 돈이 없는 가계가 늘고 있다. 그래서 보험금을 담보로 빚을 내는 가구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불안 해소책으로 준비했던 ‘미래와 노후를 위한 보험금’을 담보로 돈을 빌려 당장 먹고 살 생활비를 마련하는 가구가 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초까지 31조 7000억 원이던 보험약관대출이 1년 새 3조 원 이상 급증해 약 35조 원을 기록했다. 대출자의 대부분이 300만~500만 원의 소액대출인 점을 감안하면, 지난 1년 새 100만 가구 정도가 생계형 보험약관대출을 받은 것이다.

주요 정당들이 당권 다툼을 벌이고, 통합진보당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동안,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은 보편적 복지가 부실한 신자유주의 양극화 경제체제에서 오늘 하루도 각자도생의 힘겨운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제는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 살자’에 부합하도록 복지와 경제를 통합적으로 재편해야 하는 바, 이는 정당정치의 몫이다. 도대체 정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역동적 복지국가를 기대하는 보통 사람들이 절규하듯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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