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혜경 / 아트스페이스C 대표

▲ 안혜경

겨울의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면 길을 걷다가 시선이 자꾸 하늘을 향한다. 뻗어 오른 나뭇가지에 옹종종 꽃눈과 잎눈이 얼마나 돋아났을지 사뭇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빰에 닿는 노란 봄빛은 아직 겨울의 쌀쌀함을 여운처럼 지닌 채 따사롭다. 향기조차도 다르게 느껴지니 감동과 변화를 느끼는 가장 예민한 촉수는 아마도 오감인 듯하다.

‘달팽이의 별’이란 다큐멘터리를 보셨는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남편 영찬과 아주 작은 키를 가진 아내 순호 부부가 서로를 배려하며 느리나 섬세하게 살아가는 삶에 카메라가 아주 조심스럽게 없는 듯 끼어든 다큐멘터리다. 시청각을 다 잃은 영찬이 세상과 연결하는 통로는 섬세하고 마음씨 고운 아내 순호가 이끄는 손과 온몸의 촉각 세포들이다. 작은 아내의 사다리가 되어주는 영찬은 그의 시청각이 되어주는 순호의 손을 통해 느리지만 세상과 아주 섬세하게 소통한다. 보이고 들리는 세상에서 수많은 감동을 놓치고 살아가는 나 자신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탐험관(익스플로라토리엄)에서 오래전 기획했던 특별전 ‘메모리(Memory)’ 전시의 다양한 섹션 중 기억에 관련된 섹션 프로그램에서 한 참여자는 특정한 향기의 비누향 냄새가 불러내는 어릴 적 엄마와 함께한 목욕의 기억을 적었다. 내가 알던 한 미국여성은 베트남전에 참여했던 자기 아버지의 소각냄새와 연관된 트라우마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후각이 그의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으로 바로 연결해버리기 때문이다.

탄광노동자가 갱도에서 들었던 모든 소리들을 광부출신의 합창단원들에게 소리로 재현하게 하여 그 소리들로 합창곡을 작곡한 그리스 출신 영국인 미카일 카리키스의 작품 ‘Sounds from Beneath’(밑으로 부터의 소리)를 개관기념으로 초대해 소개했다.(23일 금요일 앵콜상영한다) 어두운 탄광 갱도에서 일할 때, 특히 예민한 청각에 남겨진 다양한 소리의 기억이 영상과 절묘하게 만났을 때 사라져 없어진 탄광 노동의 사회문화적 의미가 입체적으로 되살아나는 놀라운 체험이었다.

홍보람의 구럼비탁본을 ‘울러퍼지는 두드림-제주 강정’전으로 요즘 소개하고 있다. 부드러운 천과 한지를 덮고 조심스럽게 톡톡 두드리며 구럼비의 얼굴에 있는 섬세한 질감을 드러내주는 이 작품을 보면서 무생물이라고 무심히 지나친 바위에 얼마나 다양한 표정이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구럼비 바위 사이로 퐁퐁 솟아나던 물과 꽃과 풀들… 자신들을 감싸던 그 바위들이 깨져나가고 있으니…무서운 폭약에 파르르 떨며 구럼비 바위와 함께 억울한 몰살의 위험에 처해있다. 강정 앞바다와 마을을 부지런히 오가던 붉은발말똥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평화롭고 순박한 마을사람들의 가슴에 난 생채기는 어떻게 아물게 할 수 있을까…이 전시장을 지키며 오묘한 형상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구럼비 바위의 표정과 작가가 강정 마을에서 진행한 ‘마음의 지도’ 프로젝트에 쓰인 기억과 추억들이 마음을 참 시리게 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머리와 가슴 사이라고 한다. 이해는 하나 진정 가슴으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일 터! 예술작품은 오감을 절묘하게 자극하며 머리에 머무는 생각을 재빨리 가슴에서 느끼도록 그 긴 거리를 단축시켜주는 듯하다. 감각이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래서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런데,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결정권자와 실행자들의 오감은 다 마비됐을까? 그들의 눈에는 구럼비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들의 귀에는 강정마을주민들의 한 맺힌 울음이 들리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그들은 살육의 무기가 평화를 지켜낸다고 믿을까?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오랜 속담이 있다. 결국 무력으로는 어떤 관계도 평화롭게 만들 수 없다는 삶의 오랜 지혜이다. 해군기지건설을 밀어붙이는 자들이여! 귀를 열고 눈을 떠서 가슴으로 느껴보시라! 당신들의 혈액에도 따뜻한 붉은 피가 흐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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