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통틀어 문과 급제 제주인 58명
토착성씨 중 제주 고씨 합격률 압도적 1위

조선시대 500년간 문과시험에 급제한 제주도민은 58명이었다.

1400년대 급제자는 제주지역 유력 성씨였던 고씨 일가가 유일했고, 1500년대에는 단 1명도 없었다. 1600년대에는 외방별시가 열리면서 급제자가 다시 배출됐다. 1700년대 영·정조가 고른 등용을 중시하면서 급제자가 크게 늘었고 1800년대에는 출세의 문이 좁아지고 소과 급제를 통해 양반으로서의 체면을 살리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논문에 따르면 조선전기의 급제자 고득종, 고태필, 고태익, 오섬, 변경우, 변경붕, 신상흠 7인을 제외하고는 당상관의 반열에 오른 이는 없었다. 대부분의 급제자들은 중앙의 한직이나 지방의 관직으로 재수됐다.

최근 발표된 「조선시대 제주지역 문과운영과 급제자 실태 분석」(제주대 사학과 석사) 논문에 따르면, 1400년대를 통틀어 제주출신으로 문과 시험에 합격한 이는 4명에 불과했다. 득종·태필·태익·태정, 모두 제주 고씨를 성관으로 하는 고득종 일가였다.

제주 고씨는 탐라시대 이래 제주지역을 대표하는 유력한 토성집단이었다. 고려말 조선초기 자신들의 출신 성분을 바탕으로 이 시기 유일한 급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재경사족화(在京士族化)되면서 제주와 단절된다.

의아스러운 것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급제한 58명중 제주 고씨가 총 11명으로 압도적 다수를 기록한 반면, 또다른 제주토착 성씨인 양씨와 부씨는 각 1명에 한정됐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제주사회에서 제주 고씨의 위상이 양씨나 부씨에 비해 월등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여말선초에도 제주 고씨는 제주지역 유력세력이었다. 고봉례의 아들 고상온이 세직(世職)인 제주도주관좌도지관을 승습했고, 고봉례의 동생 고봉지는 조선초 상호군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그런 그의 아들이 바로 고득종이었다. 이런 출신성분에 의해 고득종은 음서(蔭敍)로 종7품의 문관직인 직장(直長)으로 출사한 뒤 조선시대 최초의 제주지역 문과 급제자가 됐다.

1500년대에는 급제자가 전무했다. 1445년 좌우도지관이 폐지되면서 중앙에서 보낸 수령중심으로 향촌 지배체제가 바뀌었다. 토관세력이 약화됐고, 지리적인 요인에 따라 중앙과의 연계성이 부족했던 제주는 육지부와 단절됐다. 이 시기 문과의 근간이 되는 유학교육도 취약했다. 건국 초 제주향교가 설치되고 세종때 대정과 정의현에 향교가 건립됐지만, 교수와 훈도직의 관원들이 제주를 기피했다.

그러나, 조선 인조(1623~1649)를 기점으로 제주지역 문과 운영에 변화가 일어난다. 1600년대 제주지역에서 외방별시가 치러지면서 급제자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 시기 향교의 기능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데 비해 이 시기 유학교육은 유배인을 통해 한층 깊어졌다.

1700년대는 선조에서 숙종까지 이어진 당쟁이 종지부를 찍고 노론에 의한 일당독재가 이뤄졌다. 영·정조는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탕평책을 썼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제주지역에서도 이전과 달리 많은 급제자가 나왔다. 이 무렵 제주지역 급제자는 21명, 조선시대 전체 합격자의 36%에 달했다.

한편 1800년대에는 문과를 통한 입신양명의 문이 좁아지고, 소과 급제자가 증가했다. 1800년대 후반 제주지역 급제자 3명은 철종 이후 제주지역에서 문과고시가 따로 열리지 않으면서 모두 한양으로가 어렵게 경과정시에 응해야 했다. 또, 조선시대 제주지역 소과 급제자 26명중 80%인 21명이 이 시기에 배출됐다. 소과는 일종의 예비고시였다.

이와함께 논문에서는 총 58명의 합격자중 47명이 제주목에 집중됐다는 내용도 보인다. 학제 탓이었다. 문과급제와 유학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였고 유학교육을 중심으로 문과 급제자의 거주지가 형성됐다. 제주목을 중심으로 설치된 장수당과 귤림서원·삼천서당·좌우학당·동서학당이 분포한 지역을 중심으로 급제자가 집중됐다.

급제자들의 성씨도 몇 개로 한정됐다. 급제자 총 58명은 25개의 성관에서 배출됐는데, 이중 제주 고씨가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광산 김씨와 원주 변씨가 각 6명으로 뒤를 이었다. 동래 정씨가 4명, 군위 오씨와 나주 김씨가 각 3명을 배출했다. 25개 성관 가운데서도 6개 성씨의 급제자 비율이 조선왕조 전체의 58%에 달했다.

논문은 「국조문과방목」「진신선생안」「탐라기년」「탐라관풍안」「탐라지초본」「왕조실록」등을 토대로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재된 급제자 수를 자료의 신빙성에 따라 추렸다.

논문은 「국조문과방목」「진신선생안」「탐라기년」「탐라관풍안」「탐라지초본」「왕조실록」등을 토대로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재된 급제자 수를 자료의 신빙성에 따라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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