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상이 / 제주대학교 의료관리학 교수,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 이상이

요즘 여야 정치권의 정쟁거리 가운데 가장 뜨거운 것의 하나로 한미FTA를 들 수 있다. 3월 발효설이 유력한 가운데, 이명박 정부가 재협상한 기존의 한미FTA를 그대로 발효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야당의 주장에 약 70%의 국민이 대체로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민주통합당이 ‘한미FTA 폐기’를 주장했고, 이에 대해 정부여당이 “참여정부 세력의 말 바꾸기”라며 신뢰성의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문제는 총선을 뜨겁게 달굴 정치적 이슈로 부상할 전망이다.

나는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이번 한미FTA 협정이 그대로 발효되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것이 기존의 자유무역협정들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미FTA는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끌어왔던 시장만능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의 경제체제와 관련 제도를 우리나라에 그대로 이식하는 동질화 또는 일체화의 과정을 의미하는 바, 이는 곧 우리나라의 경제주권, 사법주권, 그리고 정책 자율성을 상당히 제약하는 결과를 빚게 되고, 현시대의 중요한 과제로 부상한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FTA 이슈가 가지는 이러한 휘발성 때문인지, 지난 주말에는 주요 공중파 방송의 시사토론 프로그램들에서 이 주제를 일제히 다뤘다. 이들 토론회에서도 여느 때처럼 김종훈 전 본부장이 패널로 참석했다. 그동안 한미FTA를 둘러싼 이와 같은 찬반토론이 이미 수차례 진행됐고, 언론에도 수없이 보도됐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핵심적 쟁점에 대해 서로가 어떤 주장을 펴게 될지 대개 알고 있다. 그래서 한미FTA에 관한 김종훈 전 본부장의 주장과 발언은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늘 하던 그대로 자유무역의 장점을 옹호하고, 성장을 위한 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내 귀에 황당한 소리가 들렸다. “성장을 해야 일자리도 있고, 분배할 게 생긴다. 분배로는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결국,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한미FTA를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성장지상주의다. 또 분배로는 일자리를 만들 수 없다(즉, 성장과 무관하다)는 논리로 분배의 소비적 성격을 강조했다. 전형적인 ‘성장-분배 이분법 논리’이다. 이는 이미 낡은 영미식 패러다임이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성장과 분배가 유기적 일체이며, 이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논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분배 없는 성장은 더 이상 불가능하며, 분배야말로 성장의 기반이자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첩경임이 이미 경험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분배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가령, 보육·교육과 의료에 대한 정부지출의 획기적 증대로 이들 사회서비스 분야의 공공성을 크게 높이는 것은 인적자본을 배양하는 사회적 투자로서의 경제적 성격(성장 잠재력 배양)에 더해, 이렇게 늘어난 정부재정의 투입으로 인해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게 되므로 일자리 창출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사회서비스 분야의 공적 일자리는 선진복지국가들에서 고용을 늘리는 데, 특히 여성 고용의 증대를 통해 노동시장의 남녀평등을 이루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볼 때 분배는 성장 정책이자 일자리 정책이다. 그런데 김종훈 전 본부장은 정반대의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이는 그가 분배를 ‘가난한 사람을 선별해 생계를 지원하는 것’ 즉, 선별적 복지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실제 선별적 복지는 미국적 시각에서 보면, 빈자의 소비를 지원하는 것으로 생산적 함의가 별로 없다. 그래서 이것이 과도하면 성장에 부담을 준다. 이러한 편협한 시각, 즉 2008년의 금융 및 경제 위기 이후 그 실체가 드러난 실패한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복지체제를 그대로 따라 하려는 낡은 목소리가 대한민국 관료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제 세계경제포럼마저 인정한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올바르게 돌파하는 길은 ‘성장(경제)-분배(복지)의 대립적 이분법론’이 아니라 ‘성장-분배의 유기적 일체론’임을 명심해야 할 때다.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