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기회는 남겨주길 바라며

▲ 장정욱 기자

[제주도민일보 장정욱 기자] 20년이 지난 지금 고백하건데 나는 가해자였다. ‘직접’이냐 ‘간접’이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분명 가해자였다.

20년 전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은 ‘왕따’라는 단어를 몰랐다. 하지만 현재의 기준에서 바라본다면 우리 사이에도 ‘왕따’는 존재했다. 다만 우리가 ‘왕따’를 따돌리고 괴롭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인지하지 못한 게 아니라 잘못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나와 내 친구들은 아직 어렸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됐다. 여전히 나와 나의 ‘나쁜’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을 괴롭혔다. 물론 괴롭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난이 조금 심할 뿐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난하겠지만 당시는 별다른 죄의식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에 진학했고 군대를 갔다. 남들처럼 그렇게 일상을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이 ‘과거’는 잊혀져갔다.

솔직히 다 같은 고향 친구들이다 보니 요즘도 나는 ‘피해자’였던 친구들과 자주 만난다. 가끔 ‘피해자’ 친구들이 웃으며 그 시절 이야기를 먼저 꺼내기도 한다. ‘가해자’인 우리는 정말이지 지금도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 시절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몇 번을 사과해도 여전히 미안하다. 우리는 아마 평생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 동안 우리를 계속 용서할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우리는 용서를 받았다. 우리는 그때 그 시절 강제로 전학 보내지거나 ‘소년원’ 같은 곳에도 가지 않았다. 그냥 용서 받았다. 지금은 생각도 못할 일이겠지만 친구들은 우리를 용서했고, 사회는 우리를 안아줬다.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폭력은 남기 마련이다. 인지하지 못할 뿐 폭력은 언제나 심각하다. 손쉬운 해결 방법은 ‘격리’다. 가해자를 피해자 주변에서 떨어지게 만들고, 사회 한 구석에 묶어놓으면 적어도 순간이나마 문제는 해결 된다.

그런데 이 방법은 결코 최선이 아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가해자라고해서 그들을 버려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감히 그들에 대해 용서라는 단어를 꺼내 본다. 막연한 용서를 바라는 게 아니다. 무작정 포용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피해자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리’와 ‘처벌’이란 단어 속에 용서와 포용에 대한 고민을 조금만이라도 담아주길 바란다. 지금은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언젠가 그들이 무릎 꿇고 용서를 빌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회는 남겨줬으면 한다.

나는 믿는다. 나와 내 친구들이 그러했듯 지금 이시대의 가해자들 역시 세월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른’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수 없이 용서를 빌고, 자신을 벌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 우리의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달라고 감히 간청해 본다. 격리와 처벌 속에 용서의 씨앗 하나만 심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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