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종수 기자

오래 전 중국 여행 중의 일화다. 어느 날 북경거리를 걷던 중 노점에서 과일을 파는 행상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단연 눈에 띈 것은 귤.
 
한 봉지 가득 30여개의 귤을 5위안(당시 700원 상당)에 흥정했다. 싼맛에 기대감이 없었는데 웬걸, 기막힌 맛에 귤 까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고향의 귤보다 낫다는 생각과 함께 ‘중국 귤이 국내 상륙하면 큰일’이라는 걱정도 함께였다.

순간 중학교 때 교내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은 한 친구의 글이 생각났다. 바나나 농사를 짓다가 수입개방에 망해 택시운전기사를 하시던 아버지의 고뇌와 눈물을 어린 아들의 시선으로 담아낸 글이다. 가족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던 친구의 애절한 가족얘기는 내 마음 속 느낌표를 찍어놨다. 

다시 한 번 불어닥칠 수입 개방에 대한 염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한·미FTA 국회비준에 따른 분노의 ‘농심’이 여전한데도 정부는 한·중 정상회의를 계기로 양국 FTA 협상에 속도를 낸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속이 타들어가는 농심과는 달리 정치권과 언론이 ‘남의 일’ 대하는 태도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비준처리 시한을 알고서도 날치기 역풍에 따른 정치적 반사이익을 기대해 방치했다고 한다.

언론 역시 비난의 시선을 피할 순 없다. 국회가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한 다음 날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한나라당이 한미 FTA 비준안을 처리한 것은 야당의 무조건적인 반대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우리는 본다”고 했다. 여당의 ‘날치기 처리’ 불가피성을 역설하며 옹호한 것이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동아일보>는 “날치기 통과시키는 것은 국민주권을 유린하는 처사다. 그 속에서 죽어나는 것은 국민이요 민생이다”(1999년 5월4일자)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열린우리당이 날치기를 하면서 의사봉 대신 국회법 책자로 책상을 두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여태 이 지경이구나 하고 부끄러웠다”(2004년 12월8일자)고 했다.

정권이 바뀌면 논조도 바꿔 버리는 언론의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비단 정치권과 언론뿐이겠는가. 설상가상 정부는 FTA를 두고 한국이 미국을 점령하는 ‘경제 영토의 확장’이라며 국민을 설득하고 있으니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역으로 미국이나 중국의 한국 경제침략은 볼 줄 모르는 것일까.

바다 속 상어의 자유는 작은 물고기에겐 죽음을 뜻한다. 좁은 한국 시장에서 미국 거대자본이 자유롭다면 한국의 기업과 산업은 그들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행여나 근심 가득한 농부의 어린 자식들 시선으로 또 다시 20여년 전 글이 쓰여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한·중 FTA 협상 개시, 찬바람 매서운 한파에 농민의 애달픈 음성이 커질 것만 같다.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