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 <제주대 철학과 교수>


윤정희는 우리 시대 청춘의 영원한 로망이었다. 머언 학창시절, 하교길 굴다리 밑에 붙은 영화 포스트의 신인 여배우에게 그만 시선이 꽂혀버렸다. 당시 개봉관이던 부산 대한극장에서 그녀의 데뷔작인 ‘청춘극장’을 보았다. 동네 친구 녀석을 꾀어 무모한 일탈을 시도했다. 교외지도부에 걸리는 날엔 최소한 유기정학을 감수해야 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녀를 다시 스크린에서 만났다. 눈부신 20대의 꽃미녀는 60대 중반의 시골 할머니 미자 역으로 돌아왔다. 약간의 푼수기에다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는 시골 할머니, 이혼한 딸이 두고 간 외손자를 거두며, 파출부 노릇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는 미자는 시를 쓰며 항상 꽃무늬 옷차림에 우아하게 살고 싶은데 팍팍한 삶의 질곡은 쉽사리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시로 옮겨간 일탈


그녀에게 시는 버겁고 비루한 현실에 대한 도피처이자 심리치료제였다.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모인 학부모들의 첫 모임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좌중을 빠져나온 미자는 식당 앞에 핀 꽃을 만지작거리며 향기를 맡는다.

도저히 그런 상황에서 나올 수 없는 생뚱맞은 행동이었다. 어린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엄청난 사건의 한 가해자가 애지중지 키운 불쌍한 외손자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그녀는 자학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문학강좌에 등록해 열심히 시를 배우고, 시낭송회에 나가는 것으로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 한다.

학부모를 대표해 피해자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서도 그녀의 일탈된 과잉 행동은 계속된다. 예의 하늘거리는 의상에 하얀 모자를 쓰고,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들일에 여념이 없는 피해 소녀의 어머니에게 다가간 미자는 본연의 임무는 망각한 채 생명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며 개념 없는 사설만 늘어놓다 발길을 되돌린다.
 

시를 버리면서 시가 된 역설


이 영화가 시종 묻고 있듯이 과연 시란 무엇이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시가, 아름다움이 나락으로 내몰린 한 인간의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꽃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면 부조리한 일상은 잊을 수 있는가. 유미주의는 때론 고통에 찬 현실의 마취제로 그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 것이 온당한가. 그녀도 그럴 수 없다는 도덕적 책무와 내면을 가꾸고 싶은 미적 열망 사이에서 번민한다.

소녀가 투신한 현장을 찾은 미자는 노트를 펴놓고 시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몰려온 소나기가 클로즈업 된 노트 위에 후두둑 떨어지면 멀찌감치 뒤로 빠진 카메라는 강변 갈대숲에 우두망찰 앉아 내리는 빗줄기에 처연하게 몸을 내맡기고 있는 미자를 잡는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름답게 연출된 신이다.

시작 노트에 굵은 반점으로 점점이 맺히는 빗방울의 메타포는 참담한 현실 앞에 선, 미자의 흔들리는 영혼의 얼룩이다. 시적 이상과 가혹한 현실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영상미는 시를 쓰며 아름답게 살고 싶으나 이를 용납하지 않는 지난한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카메라는 극단적인 앵글과 클로즈업 숏을 자제하고, 아이 레벨 숏이나 미디엄 숏으로 냉정하고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절제된 카메라의 움직임과 앵글은 관객들로 하여금 과도한 극중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상의 본질에 다가서게 만든다. 프레임을 작위적으로 예쁘게 꾸미려 하지 않고, 도시 근교의 퇴락된 풍경을 적막하고 신산한 주인공 내면의 심리와 중첩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소녀가 투신한 다리 위에 죽은 소녀의 환영이 비치고, 도도하게 흐르는 푸른 강물이 프레임에 꽉 차게 들어오면서 미자가 쓴 시 ‘아네스의 노래’가 소녀의 뒤를 받아 미자의 내레이션으로 흐른다. 시적 이상과 현실이, 아름다움과 도덕이 접점을 찾은 순간이다. 시를 버리면서 시가 된 역설의 아름다움이 오래오래 가슴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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