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의 편지] 오석준 / 편집국장

▲ 오석준

시대정신이라고 하지요. 1769년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헤르더가 처음 사용했다는 이 말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관통하는 정신적 가치와 이념, 경향 정도로 풀이하면 대충 맞을듯 합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시대정신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했지요.

돌이켜보면, 역사의 고비마다 그 시대를 이끈 지도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삶을 통해 시대정신을 몸소 체현(體現)함으로써 한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특히 영웅적 지도자에 대한 갈망과 ‘보스’ 추종주의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는 더욱 그러합니다.

해방이후 60여년의 우리사회 흐름을 ‘박정희 시대’와 ‘김대중·노무현 시대’로 구분한다해도 크게 틀리지 않겠지요.
 
박정희가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의 상징이라면, 김대중·노무현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의 상징이라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김대중·노무현 시대는 과거 냉전에서 탈냉전,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전환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진전을 이뤄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 집권세력 역량 부족과 내부 분열, 대한민국 사회의 이념적 간극 등의 한계를 뚫고 정당개혁을 비롯한 정치개혁과 지역구도 타파, 지방분권, 사회적 공정성 등 추구하는 가치들을 온전히 제도화해내지 못했다는 것도 부인할수 없지요.

노무현 정부때 집권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을 차지하면서 60년 동안 누적되어온 정치·사회적 병폐들을 해결하기 위한 의욕적인 시도들이 좌절되거나 형체가 없이 갈갈이 찢기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세계화로 치장된 신자유주의 물결속에 드러난 사회적 양극화와 세계적인 경제불황 등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뒤집어쓰고 정권을 넘겨주었지요.

오로지 ‘경제’ 하나로 선택받은 이명박 정부의 트렌드는 건강한 먹을거리를 요구하는 촛불집회 참여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비롯한 표현의 자유 제약 등 법치를 가장한 권위주의 체제로의 회귀입니다.

4·3을 비롯한 불편한 과거 역사에 대한 극우보수세력의 반란,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을 가장한 해군기지 강행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더욱이 대기업·부자 감세와 4대강사업 등 토건개발 지상주의를 통해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의 짙은 그늘은 사회적 양극화와 불공정성의 심화로 인한 국민적 갈등의 확산으로 이어집니다.
 
‘안철수 신드롬’은 이명박 정부를 반면교사로 한 성찰적 시민사회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갈망의 표출이기도 하겠지요. 이른바 ‘포스트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요구입니다.

이미 철이 지난 ‘버전’으로는 보다 폭넓은 참여민주주의의 가치, 기회와 경쟁의 공정성, 노동·사회복지를 통한 분배와 재분배의 공평성 등 시민사회의 욕구를 담아낼수도,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끝내 거스를수 없음도 역사의 교훈입니다.

지금 제주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일까요. 아니, 있기는 한지요.

특별자치도 제주가 지향하는 동북아 교류협력의 거점 국제자유도시이자 세계평화의 섬을 관통하는 평화와 상생, 인권과 환경이라는 가치들도 해군기지라는 ‘괴물’이 쳐놓은 덫에 갇혀버렸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이해관계에 얽힌 다른 목소리들이 맞닥뜨리면서 발생하는 도민사회의 파열음에도 도지사를 비롯한 제주도정도, 제주출신 국회의원들도, 사회협약위원회 같은 그럴듯한 기구도, 이땅의 주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보고 있지요.

이것이 1995년 민선도지사 선거이후 제주사회에 드리운 우·신시대의 유산 가운데 하나라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니겠지요.

줄서기·줄세우기에 ‘아군 아니면 적군’이라는 이분법적 편가르기,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치킨게임 의식이 지배하는 ‘제로섬사회’에 시대정신이나 갈등조정 기능 같은게 자리할 틈새가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도민사회에 자리잡은 잘못된 의식 가운데 하나는 ‘포스트 우·신시대’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민주시민사회일수록 ‘영웅적 리더’의 설자리는 좁아집니다.

개인주의나 작은 이해관계를 벗어나 바람직한 가치를 공유하고 시대정신을 일구어가는 도민사회 공동체가 사람을 키우는 터전이고, 아래로부터 생동하는 리더십이 미래를 밝힐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