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마을지로 보는 옛도심 추억사] 1. 시작하며

남수각 동쪽 일도동의 옛날과 오늘 모습.
 옛사진 속 왼쪽편 높은 건물이 동부교회, 오른쪽 하얀 기둥이 동문 측후소다.
 옛 사진은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 모습」에서 발췌. <박민호 기자 mino@>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끝낭 뭐할거? 중앙로 가게” “정석책 사고 팥빙수 먹게” “아이들도 가켄?” “어, 진숙이 옷 사켄” “게믄, 가게”

1990년 중앙·칠성로에는 삼삼오오 교복입은 학생들의 무리가 물결을 이뤘다. 육지부에서 롤 좀 말아봤다는 미용실과 신(新) 인테리어를 도입한 커피숍, 대형서점과 술집·의류가게 등이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과 병원·은행도 밀집해 장보러 나온 엄마와 마주치는 학생들의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 일대는 1970~1980년, 문화가 피어나는 곳이었다. 칠성로가 문화계 장년층의 밀집지였다면 한짓골 일대에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 중심에 다방이 있었다. 공간이 부족한 때 다방은 전시가 이뤄지고 음악감상회가 열리고 토론이 이어지던 예술가들의 본거지였다. 당시 화가 강태석·한명섭·홍정표·김택화 등이 다방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근엄한 도내 인사들이 젊을 적 시대를 풍미하던 중앙·칠성로

첫 극장, 첫 대형백화점 입점한 문화의 메카이면서

해군병원·제중의원·서북청년회·제주신보 있던 근대사 시작점이기도

각출판사 박경훈 사장에 따르면 지금 제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많은 인사들이 그 곳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국회의원 강창일과 고희범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민속학자 문무병씨와 고충석 전 제주대 총장 등이 그랬다. 그곳에는 막걸리문화로 대변되는 학사주점이 대거 몰려 있었다. 1968년 남양문화방송이 개국하고 천주교 제주교구와 신성여고가 들어서면서 방송인과 종교인, 학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또 다른 문화의 메카가 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해방직후에는 육지부에서 피난 온 수많은 예술가들의 거리였다. 제주문학의 씨앗을 뿌린 계용묵 선생과 박목월을 비롯해 화가 이중섭·장리석·홍종명, 연극인 김묵 등의 발길이 닿았다. 이들은 제주에 거주하는 동안 교편을 잡거나 제주문화인들과 교우를 쌓았다. 세종의원 김순택 원장에 따르면 칠성로 일대는 화가 강태섭·한병섭·김택화, 사진가 홍석표·고영일·부종휴를 비롯해 시인 양중해·김종원·강통원·문충성 등 제주문화 거장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 모습」에서 발췌.

이 일대가 문화의 아지트로 성장한 데에는 중심지라는 이점 외에 문화시설의 운집이 한 몫 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도내 첫 극장인 ‘창심관’(현 제일은행 자리)이 자리해 있었다. 해방후 제주(1948)·중앙(1956)극장에 이어 1960년대에는 코리아·동양극장을 비롯한 극장들이 들어서며 영화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또, 1973년에는 도내 첫 대형매장인 아리랑백화점이 입점하면서 ‘제주의 명동’으로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칠성로는 제주 근대사가 살아숨쉬는 곳이기도 했다. 1950년 해군제주기지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동문시장 입구 후생의원 건물에 해군병원이 들어섰고, 1950년 제주도유지사건의 산실인 제중의원과 김치과의원 등도 칠성로에 자리했다. 4·3때 도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서북청년회사무실과, 제주도에 근대적인 경영기법을 최초로 도입한 기업가 박종실의 상점이 자리했던 곳도 칠성통이다.

저널 비평의 유일한 창구였던 <제주신보>도 서청사무실 인근에 자리했는데, 제주도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인쇄해 준 협의로 잡혀 수감됐던 김호진 편집국장이 10월31일에 처형되기도 했다. 3·10총파업투쟁위원회 본부 터와 민족전선 간부들의 아지트도 칠성통에 있었다.

추억만 안고 낡아버린 그때그곳

이렇듯 추억과 문화·사회운동의 메카였던 중앙·칠성·동문로 일대는 그러나 1990년대말을 기준으로 쇠퇴일로에 섰다. 신제주와 신시가지, 노형 등으로 상권이 분할·이동하면서 역사가 깊은만큼 허름하고 복잡한 구도심 상권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행정은 전통시장 살리기와 구도심 재생사업 등을 추진하며 구도심에 가치부여와 회복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미 옮겨간 시민들의 관심을 끌어올 묘안을 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중앙·칠성로 일대 쇠퇴의 아쉬움은 이곳이 지난 60여년간 근대문화의 발상지로 기능하기 훨씬 이전부터 제주 섬의 중심이었다는 데 있다.

수장의 집무청이 있었고, 교육의 근간인 향교와 귤림서원·삼천서당이 있었다. 산지천과 병문천, 한천 등의 물길을 따라 사람들의 삶이 이어져왔고, 현재의 관덕정에서 서문에 이르는 도로는 제주 최대의 광장이었다. 탐라시대부터 일제·해방후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긴 시간동안, 지금 우리가 ‘구도심’이라 부른 곳에서 제주를 움직이는 힘이 잉태, 육성돼왔던 것이다.

이에 본보는 일도·이도·삼도의 변천사를 통해 ‘옛도심의 추억’을 만나고자 한자. 자료는 동지(洞誌)를 기본으로 행정에서 발간한 옛 사진집과 제주도·제주시 개발사, 통계연보, 제주도지 등을 참고키로 했다.

옛도심에 대한 도내 문화인들의 증언과 글로 기억을 빌리고, 역사에 대한 내용은 고광민 제주생활사 연구자와 김일우 제주문화예술재단 연구원, 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 부소장 등의 감수를 받고자 한다.

대개의 동지(洞誌)가 일제시대 이후의 자료를 시작점으로 편찬됨에 따라, 마을 변천사는 도로 개설과 행정구역 개편을 중심으로 엮고, 그 이전 이어진 역사적 의미는 마을에 남아있거나 존재했던 유적을 중심으로 기술할 예정이다. 여기에 개발로 달라진 사람들의 생활상을 사진과 이야기로 머무릴 생각이다.

특히 50~60년전 추억의 흑백사진중 현 위치를 알 수 있는 사진을 골라 그때와 지금의 모습을 함께 실어 변화상을 극명히 알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본 기획은 원도심에 대한 도민들의 잃어버린 욕구를 되지피기 위한 것인 만큼, 깊고 방대한 역사적 내용보다 마을내 흥미로운 주제를 중심으로 형식에 얽매임 없이 기술할 예정이다.

지금은 낡아버린 옛도심에서, 아주 오래전 제주섬엔 어떤 일들이 벌어진걸까. 그 기억의 선로(線路)를 매주 따라가보자. <제주도민일보 문정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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