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스트 한옥경씨

▲ 플로리스트 한옥경씨
대학 중퇴 후 23살때부터 ‘꽃집아가씨’로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로 시작하는 봉봉 브라더스의 경쾌한 리듬의 곡 ‘꽃집의 아가씨’는 국민 애창곡이었다. 멜로 영화의 여주인공 직업 설정 역시 ‘꽃집’이 단연 인기다.

남심을 사로잡는 꽃집 ‘매력녀’는 노래나 영화에만 가능한 비현실적 설정은 아닌가 보다. 23살 한옥경씨가 바로 남심을 설레게 한 꽃집 아가씨. 먼 동네 청년들이 찾아와 기웃거리기도 했다.

“왕년에 그런 시절을 보냈다는 거죠. 벌써 21년 전 얘기에요. 꽃집을 운영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친오빠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좋은 시절 다 보낸 거죠 뭐(웃음)”

현재 한씨는 손수 만든 결혼축하 3단 화환을 거뜬히 들어 나르는 아줌마다. 세 아이를 낳고 키우며 20년 넘게 꽃집을 운영하다 보니 ‘파워우먼’이 다 됐다.

꽃집을 운영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 1986년 대학에 입학한 한씨는 1학기를 겨우 보낸 후 그만뒀다. 낯선 서울 생활이 힘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

“학창시절 진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 본적도 없이 대입공부에만 전념한 탓일지도 모르죠. 그래서인지 학과 공부가 전혀 맞지 않더라고요”

그러던 중, 유난히 꽃을 좋아하던 친언니로부터 꽃집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다 직장이나 장사 둘 중에 이왕이면 장사가 낫겠다 싶어 마음을 굳혔다.

“당시에는 ‘플로리스트’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때라 아줌마들이 주축이 된 ‘꽃꽂이’에 재미를 붙였어요. 또 갓 시작한 꽃집이 꽤 잘 되면서 이거다 싶었던 거죠”

다른 가게에서 만든 것보다 더 잘 만들겠다는 욕심에 불탔다. 남들이 따라올 수 없게 만들어야 ‘돈’이 된다는 노하우도 생겼다. 부족했지만 잠재된 스스로의 예술적 본능을 마구 끄집어냈다는 한씨.

“모든 게 순탄했지만 어려운 점은 외부적 요인이더라고요. 이를테면 ‘꽃은 과소비’라는 사람들 의식과 지인·광고 중심의 영업방식, 독특한 화훼 유통구조 등이었죠”

아무래도 화환·조화 등 경조사 관련 꽃 주문이 가장 많고 주수입원이 된다. 지인·광고 영업 없이는 힘든 구조이기도 하다. 도내에서 생산되는 화훼를 바로 살 수 있는 공판장·판로도 전혀 없다.

가장 인기 있는 꽃인 장미·국화·백합·거베라 등은 도내에서도 재배되지만 서울 양재 꽃시장을 거치고 온 ‘물건’들만 살 수 있다. 화훼농가의 안정적 판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유통구조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화훼시장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열악하고 협소한 도내 화훼 거래시장과 농업인의 입장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나 싶어요”

20년 넘게 꽃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몇 해 전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이 있었다. 연로하신 한 할아버지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주말마다 꽃을 사러왔다고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4년 동안 단 한주도 거르지 않고 국화꽃 3다발을 원했던 할아버지. 그러다 갑자기 발길이 끊겼고 그 궁금증은 며칠 후 꽃배달을 위해 찾아간 노인복지회관에서 풀릴 수 있었다.

“심해진 중풍에 앓아누운 후 돌아가셨더라고요. 왜 국화 3다발을 사가셨는지 노인회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됐어요. 하나는 어머니 산소, 또 하나는 아내 산소, 나머지 하나는 며느리 산소를 위해서였죠”

공무원인 남편이 은퇴하면 꽃가게를 접은 후 한적한 시골에 가서 나무를 키우며 살겠다는 한씨. ‘꽃’으로 세 아이 다 키웠다면 부부의 노후생활은 ‘나무’가 책임질 거라고 했다.

/한종수 기자 han@jeju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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