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연구소 주최 증언본풀이마당
유해발굴조사로 62년만에 가족 찾은 유가족 3인 자리


“아버지의 내력을 듣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일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는 알게되는 일이다”

제주4·3연구소 문무병 이사장은 4·3증언본풀이 마당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4·3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내력을 듣는 것이 아니라 4·3이란 역사를 알게되는 일이라는 말이다.

30일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제주4·3연구소 주최로 증언본풀이 마당이 마련됐다. 세 명의 증언자가 자리했다. 이들은 모두 지난 2008년 시작된 제주국제공항(정뜨르) 제2차 유해발굴을 통해 가족을 찾은 이들이다.


오라동 박두선 할머니(88, 사진)도 이때 가족을 찾았다. 4·3때 잃은 시아주버니였다. 박 할머니가 시아주버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62년전 관덕정 경찰서 앞 벚꽃나무 아래서였다.

“경찰서 들어가는 길 양쪽에 서에 잡혀간 사람들이 쭉 나왕 앉아십디다. 볕들 쐬암구나 해서 우리 시아주방도 이신가 살피는데 멀리서 우리 시아주방도 나를 보고 손을 영 들러요. 그 뒤에도 볕날때 관덕정 마당 이래저래 왔다갔다 하멍 손들엉 알은 척 해놔신디 그게 마지막이주” 그리고 며칠뒤 시아주버니는 비행장으로 갔고 그날 죽었다. 그때 시아주버니 나이 스물세살이었다.

“게난, 거기 굴을 파서 들어쳐신가? 그냥 나 10월1일, 그날로 제사지냄서” 시아주버니의 제사는 박씨의 아들이 지내고 있다. 미처 장가도 들지 못한 시아주버니였다.

그땐 자고 나면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누군가 손가락질만 해도 잡혀갔다. 박씨의 남편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편이 화장실에 가려고 하니까 사람들이 모다들엉 남편 어디감신고 하는 거라. 화장실에 간다고 하니 도망가카부덴 따라강 일보는 사람신디 총구를 겨눤. 경하난 똥이 나와야지. 한참을 지나도 볼일을 못 보니 사람들이 도망가려했다고 오해행 경찰서에 데려가부런”

남편은 함께 잡혀있던 이들이 모두 풀려난 뒤에도 나오지 못했다. 누군가 그를 가르키며 손가락질을 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풀려났지만 고문의 상처는 등뼈가 튀어나오는 병을 남겼다. 그리고 가족은 일본으로 갔다. 힘든 삶이었다. 현실은 팍팍했고 과거는 두려움을 달고 늘 이들을 좇아다녔다. 그리고 여든두살의 노인이 되어 지난 2005년 박씨는 다시 제주땅을 밟았다.

박씨는 “일본 병원에서는 등뼈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남편은 수술 대신 매일 약만 먹고 살았다”며 “돈은 없는데 아들은 공부만 하려하고 남편은 몸이 아파 돈을 벌지 못 했다”고 어려웠던 삶을 덧붙여 설명했다. 하지만 제주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아 시아주버니를 유골로라도 찾게 된 것에 대해 서글프지만 다행이라고 말했다.

“난 일본 오갈때에도 비행장 잘 못 봐난. 지금도 공항버스 안 타고 빙 돌아서 가는 버스타지. 그쪽 가믄 시아주방 묻힌 곳 자꾸 봐지니까”

한편 이날 증언본풀이 자리에는 산으로 숨었다가 죽은 남동생을 유골로 다시 만난 유수암리 강조행 할아버지(88)와 둘째 형의 유골을 품에 안게 된 노형 월랑마을 양상준 할아버지(74)가 함께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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