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박물관 만든 윤세민 선생

200여년간 내려온 희귀유품 120여점 전시
역사적 가치 인정받아 국립박물관에 기탁도

“선생님 댁 찾아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강정마을에 와서 윤 교장 찾으면 다 알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하얀 눈발이 매서운 바람에 흩날리던 날이었다. 보통 인터뷰를 할 때면 찾아가는 길을 자세히 듣곤 했지만 윤세민(81) 선생의 대답은 의외였다. 정말 아무한테 물어봐도 윤 선생 댁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얼어붙은 도로를 살얼음판 기듯 살살 달려 도착한 강정마을.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대로변 조그마한 슈퍼에 들어가 윤 선생 댁을 물었더니 정말 집 찾는 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숭모관’(崇慕館) 목판이 조그맣게 내걸린 2층 신축 건물. 이곳은 지난해 말 윤 선생이 사재를 털어 수개월만에 완성한 가족박물관이다.

“200여년 동안 대대손손 내려온 조상의 유품을 모아 둔 곳이야. 옛것의 가치를 깨닫고 가족의 소중함을 늘 간직하자는 뜻에서 박물관을 짓고 쉽게 버려질 법도 한 물건들까지 모아놨어”

조상을 우러러 섬긴다는 뜻을 담은 ‘숭모관’ 간판 외에는 박물관을 알리는 특별한 표시는 없다. 오래전부터 방 한 켠에 유품들을 모아뒀지만 좀 더 제대로 보관하기 위해 아들의 후원금(?)을 보태 탄생한 곳이다.

20평 남짓한 공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유품들로 가득했다. 1800년대 7대조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호패부터 호구단자(戶口單子), 증조부의 필체가 담긴 병풍, 각종 고문서와 교지 등 120여점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가보 1호가 신채 할아버지(1786~1882)가 사용했던 ‘호패’야. 도내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지. 일제시대 교편생활을 적어 놓은 부친의 일기장, 집안 내력이 모두 담긴 호구단자 등 여기 있는 모든 유품들이 조상의 손때가 묻은 소중한 것들이야”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유품들은 일찍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곳에 소장된 유품들 중 일부는 사학자들의 고증을 거쳐 2000년에 국립제주박물관에 기탁, 전시된 바 있다. 그러다가 숭모관이 완공되면서 다시 가져오게 됐다.

박물관이 다 지어진 후에는 전 헌법재판소장부터 다른 지방의 유명한 박물관장, 올레꾼 등 다녀간 방문객들도 많다. 얼마전 다녀간 네이버 신입사원들은 포털내 공간을 만들어 박물관 소개 코너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윤 선생은 선조의 유품들만 모아둔 게 아니라 40년 넘도록 스크랩해 둔 주요기사부터 직접 겪은 4·3사건에 관한 회고록 등 자신의 물품·기록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어린시절 부친께서 사회를 바로 알기 위해선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강제로 읽게 했지. 스크랩도 그때부터 생긴 습관이야. 4·3관련 회고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해 놨어. 나 죽기 전엔 못 볼거야. 지금은 공개 못 해”

조상과 가족에 대한 소중함이 없었더라면 스러지고 말았을 운명들. 윤 선생은 유품 하나하나 어느 선조의 손때가 묻은 것인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유품이란 가족과도 같은 버려선 안될 소중함이다.

“유품에 대한 역사적 의미보다 정신적 중요성을 알리고 싶어. 청소년들에게 조상의 지혜를 가르치는 효(孝) 교육장, 어른들에게는 가족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

유품을 닦는 그의 손길, 하나하나 설명하는 그의 눈빛은 깊고도 아늑하다. 종손으로서 마땅한 의무이며 도리라고 전하는 윤 선생. 벽에 걸린 대통령 훈장, 수많은 장관 표창장은 45년 간의 교직생활뿐만 아니라 그의 80년 인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1803년 당시 선조께서 집터를 정한 후 200년 넘게 이어온 이 곳. 오랜 세월 지켜온데다 3대째 이어가는 교육자 집안이라 강정마을에 사는 사람치고 윤 선생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핵가족화로 인한 개인 생활문화는 오래전부터 가족이라는 공동체 개념을 약화시켰다. “가족·조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퇴색되는 게 안타깝다”는 윤 선생의 말처럼 세대간의 공감도 점점 사라져 간다. 다가온 설 연휴를 맞아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한종수 기자 han@jeju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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