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표고버섯 재배는 1905년부터 시작된다. 소나무 숲속에서 아침 이슬을 먹고 생겨나는 순수 자연산 표고를 재배하는 광경이다. 주로 서어나무에서 표고를 재배한다. 제주의 표고버섯은 대부분 국유림 내 한라산 중턱에서 재배된다. 하지만 버섯 재배에 필요한 나무의 벌채 허가가 나오지 않으면서 자목 교체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재배를 포기하는 농가도 생겨나곤
▲ 1970년대 한 초등학교 교실을 찍은 사진으로, 어린이들이 모두들 꽤 진지한 태도로 앉아 있다. 가운데 앉은 까까머리 남자 어린이가 책상에 바짝 엎드려서 글씨를 쓰고 있는 모습이 퍽 이채롭다. 2인용의 낡은 나무 책상에 한 명씩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정규 수업시간은 아닌 것 같다. 책상 위에 원고지로 보이는 종이가 놓여 있음을 감안하면 어떤 글짓기 대
▲ 5.16군사정변 이후 경제개발정책이 국가 주도로 급속하게 이뤄지고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제주도는 비약적인 변모를 하게 된다. 일주도로 확장과 포장, 전기 시설, 그리고 상수도 시설 등 사회기반시설들이 1960~1970년대에 대부분 마련됐다. 특히 어승생 저수지가 완공되자 중산간 지역에까지도 상수도 시설이 완료돼 식수의 어려움을 덜어줬다.
▲ 가운데로 관덕정 건물, 그 뒤로 사라봉이 보이는 1970년대 초반의 제주시 서문로 포장 공사 장면이다. 골재를 까는 작업에 주로 여성들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채 일하고 있다. 옷가게, 약국, 이발관, 담배가게, 접골원 등이 길 양옆으로 보인다.(국기기록원).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췌.
▲ 1927년 성내교회 유치원을 마치고 기념 촬영한 모습이다. 남자 아이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한복이나 학생복을 입었고, 여자 아이들은 한결같이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뒤쪽 세 어린이는 두 손을 감싸 수료증을 받들었다. 왼쪽에서 네 번째 아이의 시선과 동정이 눈에 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제주도에 대규모 양돈사업이 시작된 것은 1962년 발족된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에 의해서다. 이시돌협회는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인 옥수수 4만5000t을 수입, 중산간 마을 인근에 양돈 개척농가단지를 조성하고 한림읍 금악리에 대규모 번식돈과 비육돈 양돈장을 개설, 양돈 개척 농가들의 양돈사업을 후원했다. 제주산 돼지의 첫 수출도 이시돌협회에 의해 이뤄졌다.
▲ 사진은 1964년도 행정당국의 단속에 압수된 심방(무당)들의 풍물이다. 심방이름과 ‘30년 무당 생활 청산’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의 크고 작은 굿을 집행하는 직능자인 심방은 시대상황에 따라 박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0년대 5.16 군사정변 이후가 그랬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가 그랬다. 당시 이들이 행하는
▲ 1960년대는 개발의 시대였다. 각종 도로개발을 비롯한 용수개발, 전기·전화사업들이 활발히 추진되면서 제주 곳곳에 개발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중에서도 일주도로의 포장사업은 제주개발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사업이다. 1963년에 착공돼 1971년 1월29일 준공된 일주도로는 총연장 181km로 8년에 8억9200만원이 투자됐다. 여기에는 정
▲ 1948년 5월10일, 부산시 영도 대교로에서 열린 장시영(현 삼남셕유회장)과 김명신의 결혼식 사진이다. 이 결혼식을 올릴 때 제주도는 4.3사건이 일어난 지 37일째 되던 날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립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근무하던 장시영은 곽명선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맨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주례를 맡았던 곽명선이고,
▲ 1980년대 도내 한 마을의 하곡 수매 현장 모습이다. 마을주민들이 마을 공동창고 앞마당에 맥주보리를 담은 가마니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품질 등급 검사를 기다리고 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옛 국립농산물검사소)에서 파견된 직원의 검사로 품질등급을 받아야 맥주보리 가마니를 창고에 입고시킬 수 있다. 등급 판정에 따라 마을 주민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한 해
▲ 1954년 3월12일 미 보병 제45사단장인 준장 하베이 피스처(Harvey H. Fischer)가 한국 제주도 고아원의 어린이들을 위해 한 모든 업적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받고 있다. 고아들 가운데 한 명으로부터 감사를 표하는 선물을 받고 있다. 사진은 한국보육원이며, 서있는 여성이 이 보육원 황온순 원장이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
▲ 바닷가 마을의 어느 어부와 가족들이 출어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마당 한쪽에 어구들이 가득 쌓여있고, 주낙낚시에 부부가 열심히 미끼를 끼우고 있다. 그 곁에 아이들이 아버지 손작업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고 있다. 눈으로 어업 일을 배운 아이들은 성장하면 가업을 잇게 될 것이다. 초가 위에는 어촌답게 폐그물로 지붕을 덮고 있다. 중산간 마을에 비해 바닷가
▲ 땔감으로 쓸 솔잎을 긁으러 가야했던 가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초겨울, 아이들은 갈쿠리 하나로 언 손을 불며 떨어진 솔잎을 긁어야 했다. 가는 나뭇가지를 밑바닥에 깔고 갈쿠리로 솔잎을 긁어모은 다음 발로 다져주며 솔잎을 모아 묶는다. 솔잎을 등에 질만큼 묶는 것을 제주말로는 ‘보달 친다’고 한다. 체크무늬 점퍼, 흰 고무신을 신
▲ 통조림 공장인 유창산업 내부에서 작업하는 광경을 찍은 1969년 사진이다. 유창산업은 제주시 삼도2동의 바닷가 즉 현재 매립지에 들어선 라마다호텔의 바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는 만장굴과 협재굴 등지에서 종균을 만들어 재배한 양송이를 통조림으로 만들었다. 하얀 코고무신을 신은 당시 복장이 이채롭다.(국가기록원). ‘사진으로 보
▲ 짚으로 둥글고 울이 깊게 되도록 걸어서 만든 그릇인 '멕'(멱서리)을 짜고 있는 제주 노인. 이 노인의 ‘멕’ 짜는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고, 한평생 이 길을 걸어온 사람 같다. ‘멕’은 제주도에서는 갈무리한 곡식을 운반할 때, 또는 저장할 때 사용하는 짚그릇이다. ‘멕’보다 작은 것을
▲ 1960년대 말 전분공장에서 사용할 고구마를 수매하는 현장이다. 당시 전분공장에서는 직접 공장이나 고구마 생산지 주변 지역에 수매하는 장소를 정해 직접 생산자들로부터 고구마를 수매했다. 당시 고구마는 농가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제주사람들은 이 고구마를 감저(甘藷)라 불렀다. 따라서 고구마전분공장도 잠저전분공장이라 했다. 고구마는 생산자가 직접 우마달구지
▲ 1969년 11월에 있었던 쌀 배급 모습이다. 탄탄하게 잡아묶은 가마니와 허리를 굽힌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습도 보인다. 뒤쪽에 서 있는 아저씨의 턱 주름살은 깊이 패어 있고, 아기 업은 아낙은 팔짱을 끼고 있다. 아낙들은 모두 코고무신을 신고 있다. 1960년대 초에 소금의 배급제가 해제되고 석유는 1960년대 후반 배급제가 해제돼 자율화 됐다. &ls
▲ 1940년대 건입동 1388번지 일대 오일장의 사람들 모습이다. 왼쪽으로 방파제가 있고, 멀리 사라봉이 보인다. ‘멕’(벽서리)을 진 사람, ‘구덕’을 진 사람, 옷 소매에 손을 집어넣고 걸어가는 사람 등 그 모습도 가지가지다. 호기심 어린 학생도 있다. 물물교환이 이뤄지던 때라 ‘멕’에
▲ 이 사진은 현재 중앙양과가 있는 근처로,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이다. 차량도 몇 대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별로 다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른 새벽인 것 같다. 중앙로는 동문시장과 이어져 있고, 지하상가가 형성되면서 구제주시권 주민들이 가장 빈번하게 이용하는 도로이다. 남북으로 관통하는 이 도로의 확장은 1966년부터 1969년 6월까지 3년에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