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 초 사이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은 제주시 삼도동에 소재한 옛 제주시청 민원실 업무모습이다. 좁은 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해 민원실을 'ㄷ'자 모양으로 꾸몄다. '제증명'·'재무'·'건설'·'병사'·'주민등록' 등의 팻말이 붙어있고, 공무원들이
▲ 찬바람이 부는 날씨에 두 아낙네가 '마다리'(마대) 위에 놓인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제주의 전형적인 초가지붕에 풍채를 달고 있는데 집줄은 가지런히 정리가 안돼 있다. 난간 위에는 허름한 진열장과 가을걷이로 수확한 호박들이 놓여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고영일 사진)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길거리로 차가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은 달리는 차를 따라 같이 달리곤 했다. 차량 배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지금은 매연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그 냄새도 싫지 않았던지 아이들은 달리는 차 뒤를 쫓아다니곤 했다. 자동차가 많이 없던 시절, 그저 신기했을 뿐이다. 사진은 1968년 무렵 제주시 서문로가 확장되기 전 모습으로,
▲ 아마 할머니 두 분은 이웃집 친구일 게다. 제주에는 이러한 초가에서 홀로 살아가는 할머니들이 많다. 중산간 어디에서든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오래된 이 돌바람벽과 창문, 꽁꽁 싸맨 초가, 안테나, 보기만 해도 튼튼하게 생겼다. 팽나무가 드리워진 지붕은 띠가 아닌 고무줄로 꽁꽁 초가를 감싸고 있다. 제주의 초가지붕은 육지마을의 초가와 다른 형태를
▲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7월8일 주한유엔민사처(UNCACK) 제주도팀 경제담당 장교인 대위 제임스 그린(MACON, GA)과 같은 팀 소속 경제부 윤상원이 제주읍 건입동 1202번지의 베다니 직물공장에서 양송원 양이 기계 베틀을 작동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클리프턴 루이스 사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 지금처럼 석유나 가스가 없어 오직 나무나 억새 등으로 밥도 짓고 군불을 때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헤매 다녔다. 장작용 나무를 하기 위해서는 멀리 '곶밭'(나무숲이 우거진 곳)에까지 가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벽녘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산림보호를 위해서 함부로 나무를 자를 수도 없었던 때라 산림단속
▲ 1970년대 우도의 잔디밭에서 금방 따온 미역을 가지런히 말리고 있는 장면이다. 무덤이 있고, 담장 너머로 보이는 것이 성산이다. 미역은 돈이 되는 해산물로, '망시리'(망사리) 가득 따다 '메역귀'가 달린 채 곱게 펴서 말렸다가 육지에 내다 팔았다. 특히 우도를 비롯한 성산, 표선 등지에서 채취되는 미역은 '넙메역'(얿미역)이라
▲ 나막신과 짚신은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전통 신발이었다. 짚신은 새끼를 꼬아 삼는 데 비해 나막신은 통나무를 파서 신발모양으로 만든다. 짚신보다 작업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짚신이 일상적으로 신는 신발인 데 비해 나막신은 비나 눈이 올 때 주로 신는다. 일종의 장화인 셈이다. 사진 속 나막신을 만드는 노인의 모습은 그
▲ 1948년 5월5일 제주4.3사건 처리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화평이냐 진압이냐"는 갈림길 선택을 놓고 열린 이날 9인 비밀회의에서 경찰총수인 조병옥 경무부장은 강경진압을, 경비대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다가 몸싸움을 벌였다. 딘 장군은 다음날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조치하고, 강경진압을 선
▲ 부인과 소녀들이 '망건청'에 나와 망건을 겯고 있다. 망건은 '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물건'으로 보통 말총을 이용해 결었다. 망건은 '쳇데기'라 부르는 위에 중절모자를 뒤집어 놓은 후 그 안에 '망건꼴'을 올려놓아 한 땀 한 땀 바늘로 엮어간다. 망건청의 난간과 그 아래 댓돌
▲ 사진은 1964년 7월3일 제주 시민회관 현판식 장면이다. 제주시민회관은 1963년 7월22일 1646만원의 예산으로 착공해 철근콘크리트 2층과 연건평 593.5평에 고정 좌석 505석을 포함한 2000명 수용 가능한 회관으로 건립됐다. 각종 문화, 예술, 기념행사, 영화상영 등이 열리는 제주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었다. 개관 기념으로 전국도시대항 탁구대
▲ 갈옷을 입은 한 아낙네가 정지에서 장작불을 지펴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그 주위로는 무쇠솥과 맷돌 등이 보인다. 우측 위의 구멍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인 듯하다. 제주에서는 부엌을 '정지' 또는 '정제'라 일컫는다. 아궁이를 설치하는 육지 민가와 달리, 취사와 난방의 기능을 구분하는 특징을 지닌다. 벽은 돌로 쌓아 흙만 발랐으며, 문은
▲ 일제강점기 서귀포에서 청새치를 포획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도르래를 이용해 포획한 청새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청새치는 황새칫과의 바닷물고기로, 몸의 길이는 3m 정도이며, 검푸르고 살은 복숭아 빛깔인데 식용한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청새치는 주둥이가 좁고 창날처럼 긴데, 한국·일본·미국의 하와이·캘리포니아 근
▲ 이 사진은 1932-1933년 구좌 월정에 사는 처형 곽천욱(1987~1965, 오른쪽)이 동생 곽문욱(1914~1999)이 있는 제주읍내로 나들이 나왔을 때 제일약방을 운영하는 제부 김태환이 촬영한 사진이다. 처형과 아내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 남자의 마음이 어땠을까. 당시 부인들은 며리모양을 머리카락을 길러 가운데 가르마를 하고 머리를 땋은 후에 쪽
▲ 1960년대 말 중앙로를 오가는 사람들 모습이다. 걸어오는 세 아주머니는 다같이 머리에 머플러를 두르고, 코트 입고 보자기를 들고 있다. ‘뚜데기’(처네)로 아기를 업은 사람과 양동이를 들은 사람은 발걸음이 좀 가벼워 보인다. 차도와 인도는 구분돼 있지만 길 한가운데만 포장돼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
▲ 지금처럼 플라스틱이나 각종 포장제품이 없던 시절에 물건을 운반하거나 보관하는데는 ‘구덕’(바구니)을 많이 이용했다. ‘구덕’은 크고 작은 것에 따라 용도와 명칭이 달랐는데, ‘물허벅’(물항아리)을 지고 다니는 것을 ‘물구덕’, 제사때 떡을 지고 다니는 것을 &lsquo
▲ 일제강점기 서귀포 읍내 곳곳에 있었던 약 15~16척(尺) 되는 고래갈비뼈의 모습이다. 천지연 하류 유선장이 일제강점기 ‘고래공장터’인데, 이곳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고 가공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포경선이 있어 연간 50~60마리의 고래를 잡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제는 1909년 동양포경주시회사를 설립하고, 울산·장
▲ 옛 제주의 결혼식은 3~5일 동안 이뤄졌다. 5일 동안의 잔치는 결혼식 이틀 전 돼지 잡는 날부터 결혼식 이틀 후 사돈잔치가 동네잔치로 이어질 때까지를 통틀어 말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잔치기간은 3일로 볼 수 있다. 결혼식 전날은 ‘가문잔치’라고 해서 돼지를 잡고 음식을 마련해 친지와 하객들에게 대접하는 날이다. 결혼 당일보다는 이
▲ 서부두 방파제 인근에서 열렸던 제주 오일장의 모습이다. 세 여인의 모습이 이채롭다. 제주에서 오일장이 언제부터 서기 시작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1910년경 관덕정 앞마당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매달 음력 2일과 7일에 열리다가 뒤에 양력으로 바뀌었다. 시장에서 주로 거래된 물종은 곡물·의류·생필품 등이었다. 어물장
▲ 1965년에 찍은 환갑잔치 모습이다. 잔치의 주인공은 강정마을에 살던 윤태준(1905년생)이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네 명은 한 마을의 갑장들로 고기생·강대화·강승규 등이다. 사과·배·귤 등의 과일을 비롯해서 떡과 밥 등이 상 위에 차려져 있고, 그 앞으로 청주와 소주 등의 술병들이 보인다. 비교적 좁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