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소녀가 오름 자락에서 마소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에서는 날마다 마소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순서를 정해 번을 섰다. 차례가 돌아온 가정에서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집집마다 돌며 마소를 몰아 들녘으로 나가 저물도록 마소를 먹인 후에 돌아온다. 보통은 남자들의 몫이지만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는 여성도 마소를 먹이러 다녔다.
▲ 1970년대 마을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물을 실어 나르는 전경이다. 주민들이 리어카에 물을 가득 채운 드럼통을 싣고 농경지로 향하고 있다. 당시에는 도내 대부분 마을들이 용천수를 상수원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지하수 개발이 일반화 되지 않아 지하수나 상수도를 이용한 농업용수 공급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가뭄이 들면 저수지나 마을
▲ 1991년 '시민학도 단결해 4.3 진상 밝혀내자!'라는 대형 현수막과 걸개그림이 걸린 채 제주대학생들이 학교에서 '4.3자주항쟁 계승 및 구국선열 추모제'를 열고 있다. 이러한 젊은 대학생들의 4.3사건에 관한 관심과 적극적 참여는 제주 사회의 4.3사건진상규명과 유가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운동에 커다란 활력소가 됐다.(김기삼 사진) '사진으
▲ 추자도, 우도, 가파도, 마라도는 물론이고 비양도 등 도내 유인도에서 주민들의 가장 큰 불편 중의 하나가 식수문제다. 비양도 역시 본도에서 식수가 공급되기 전에는 빗물을 받아 저장해 뒀다가 식수 및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본도와 비양도 사이에 송수관이 연결된 것은 1965년 10월15일이다. 제주도와 제주해역사령부의 자매결연 사업의 하나로 한림읍 협재리에
▲ 1992년 4월2일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11구의 유골과 각종 유물들이 제주4.3연구소에 의해 44년만에 발굴됐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 처참한 모습으로 공개된 다랑쉬굴을 보면서 사람들은 4.3사건의 참혹함과 그 진상규명의 시급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희생자 가운데는 여자 3명과 아홉살 난 어린이도 포함된 것으로 밝
▲ 1955년 6월 최초로 금산수원 개발에 착수해 1957년부터 제주시내 일부 지역에 수돗물이 공급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원활한 용수공급은 제주개발의 최우선 과제였다. 특히 중산간 마을에서는 여전히 봉천수에 의존해 보건위생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1967년 4월21일 한라산의 계곡물을 막아 23만 도민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 1952년 7월3일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대장과 함께 모슬포의 육군 제1훈련소를 방문해 훈련상황을 시찰했다. 사진은 사격훈련 장면으로, 이승만 대통령 옆에서 설명하고 있는 군인은 당시 제1훈련소장 겸 제주도지구 위수사령관이던 장도영 준장이다. 장도영 준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녀간 6일 후인 7월8일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육군 제1훈련소는 한국전쟁이
▲ 어승생 수자원개발계획이 본격 추진된 것은 1964년 3월 연두순시차 제주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이 중산간지대의 용수개발을 서두르라고 지시하면서 비롯됐다. 이후 1967년 4월21일 '제주도 수자원 개발기공식'이 열리고 공사현장에는 전국폭력배 일제검거령에 의해 검거된 국토건설단원 500여명이 투입된다. 공사과정에서는 폭력배들에 의한 집단 탈주와 집단 소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군을 몰아내고 제주에 진주한 미군이 안덕면 소재 산방산 아래 야외에서 예배를 보고 있다. 모슬포 보슬봉에는 미군 레이더기지가 설치됐다. 이 사진은 제주 4.3 관련 미국자료 수집 공동 조사반이 미국에서 입수해 공개한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췌.
▲ 해방을 맞은 지 5개월 후인 1946년 1월 제주읍내 어느 빨래터에서 주민들이 물을 긷고 있는 모습이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됐으나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다. 사람들은 용천수가 있는 곳으로 '물허벅'을 지고 나와 물을 길었고 또한 그 옆의 빨래터에서 정담도 나누고 정보도 교환했다.(미 스미소니언 박물관)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제주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군 제58군이 보유했던 총 등의 무기를 수거해 바다에 수장하고 있다. 미군은 1945년 9월28일에 처음 제주도에 들어왔다. 이 사진은 제주4.3 관련 미국자료 수집 공동 조사반이 미국에서 입수해 공개한 것이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췌.
▲ 1970년대의 쓰레기수거차 모습이다. 촬영장소는 칠성로로 '중앙마크사' 간판이 보인다. 쓰레기수거차가 새벽에 새마을노래를 틀고 골목골목 돌아다니면 각 가정에서는 집 앞에 쓰레기를 내놓고 이를 수거해 가는 문전수거 방식이었다. 폐기물처리비도 가구원 숫자대로 부과됐다. 지금처럼 규격봉투를 사용하는 '종량제'로 바뀐 것은 1994년 8월부터이다. 최근
▲ 1942년 9월29일 서호간이학교에서 열린 서호청년단대회 참가자들이 체육 훈련을 받으면서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둬 학교와 마을에서 전쟁에 대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학교에서는 교사의 지도 아래 수기 교육을, 각 마을에서는 청년과 처녀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 세대들은 시집가기 전에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 바닷가 부근의 빨래터에서 수건을 머리에 두른 아낙네들이 '서답(빨래)'에 열중이다. 빨랫감은 '구덕'에 담아 내왔으며, 다 빨아진 옷들은 바위에 곧게 펴서 말리고 있다. '서답마께'로 두드려 빤 흰옷은 바위의 햇볕에 널어서 바래어 더욱 희게 만들고자 함이다. 제주에서는 빨래를 '서답'이라 하는데, 이는 '세답(洗踏)'이라는 한자어가 생
▲ 제주에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의 본토 공격에 대비해 구축한 진지동굴이 도처에 남아 있다. 이들 진지는 한라산과 오름, 해안가에 구축됐다. 미군의 해안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해군자살특공기지로 구축된 것이 수제진지(水際陳地)인데 한경면 수월봉 해안, 조천읍 서우봉 해안, 대정읍 송악산, 서귀포 삼매봉, 성산읍 성산 암벽 등 5곳에 구축됐다. 1980
▲ 1960년대 말 제주시내에 임시 설치한 급수탱크에서 물을 배급받고 있는 모습이다. 물을 받을 양동이와 들통, 물통을 들고 나왔다. 물탱크에 올라가는 아이들,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보는 개구쟁이 얼굴이 재미있다. 상수원 개발이 안된 때라 가뭄이 들면 이런 모습을 제주에서는 종종 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으로 군사독재시대가 물러나면서 제주사회에도 민주주의 실천을 위한 각종 요구와 몸부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초부터 '제주개발을 위한 특별법 제정' 움직임이 구체화되면서 종래 관주도적인 입법행위와 절차에 반발하는 시민단체·학생들의 운동이 거세게 확산됐다. 1991년 11월7일에 서귀포에서는 나라사
▲ 1930년대 초가 풍경으로, 지붕 아래 가지런히 놓인 항아리들과 허벅이 정겹다. '물팡' 위에 '물구덕'이 놓여있고, 젖혀진 '정짓문'이 까맣다. 벽 가운데 구멍은 연기가 빠져나가는 '창곰'이다. '물팡'이란 '정짓문' 곁에 나부죽한 돌을 'ㅠ'자 모양으로 세워, 물을 길어 나르는 동이를 지고 부리고 하는 대를 말하고, '창곰
▲ 1960년 4월26일 밤 9시경, 제주시 관덕정 광장 3.15부정선거 관련 규탄대회에서 제주도 경찰국장이 학생들에게 해명하는 장면이다. 제주대학생, 시내 학생회 고교생들이 모여 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여학생들도 보인다. 밀리고 떨치는 과정에서 학생복까지 벗겨졌다. 연단에 경찰국장을 호위하면서 단상에 선 이는 고공영(당시 제주대 상과), 스피커를 든
▲ 옛날에는 보리를 수확하고 나면 보릿짚을 '눌'(낟가리)로 쌓아두었다가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돗통시'(변소 겸 돼지우리)에 깔아놓으면 거름이 되기 때문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그래서 보리탈곡이 끝나면 집집마다 보릿짚을 '눌'로 쌓아놓는다. 사진은 1970년대 초반 구좌읍 하도리 한 농가에서 아이들이 보릿짚 '눌' 부근에서 놀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