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옛 남제주군 지역에서 마을안길 정비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마을안길 정비를 위해 돌을 파내고 파낸 돌을 옮기고 있다. 손수레와 비료 포대를 이용해 돌을 나르는 모습도 눈에 띈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정신인 '협동' 정신이 잘 발휘되고 있는 광경이다.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처음에는 초가 지붕 개
▲ 1920~1930년대 관덕정 모습이다. 문이 달려있고, 그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남자 6명은 무엇에 올라갔는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초립을 쓴 사람, 머리를 얹은 여인, 수건을 두른 할머니 등 각양각색이다. 앞쪽에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채롭다. 머리를 땋아 길게 늘인 소녀와 짧게 깎은 머리 몇 군데 흰 점이
▲ 1968년 4월경 성산포항에서 있었던 '청구권자금에 의한 어선건조 진수식' 모습이다. 어항에 태극기를 달고 늘어선 어선들 너머로 식산봉이 보인다. 이 사업은 정부가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의 체결과 동시에 조인된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시행한 어선건
▲ 제주시 이호동 골왓마을 거욱대로, 4개가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점이 특이하다. 거욱대는 풍수상으로 허한 곳에 돌탑을 쌓아 마을의 액운을 물리치기 위한 시설로 마을공동체 산물이다. 지역에 따라 '거욱대·액탑·가마귓동산·하르방·걱대' 등으로 불리는데, 그 모양도 원뿔, 사다리꼴, 기타 불규칙한 형
▲ 1984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1987. 9. 16. 변경)로 지정된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남문 주변 풍경이다. 울창한 나무를 배경으로 초가들이 흩어져 있고, 그 너머 멀리 영주산이 자리하고 있다. 직선으로 난 골목길 왼쪽에 보이는 집은 '고평오 가옥'으로 성읍민속마을보다 먼저 중요민속자료(제69호, 1979. 1. 22.)로 지정됐다.
▲ 장시영의원 간판과 의원 입구 모습이다. 슬레이트 지붕 위의 간판은 한글로 내려썼고, 그 밑에는 한자로 가로로 썼다. 장시영은 해군병원 외과과장과 병동장을 역임했으며, 의원을 운영하면서 제14대 제주도의사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홍정표 사진)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1960년대 들어서 일주도로와 5.16도로가 포장 개통되면서 도내에도 버스회사들이 하나 둘씩 설립되기 시작한다. 일부 버스회사는 관광버스 운송업까지 겸했다고 한다. 사진은 1960년대 후반 무렵 제주여객버스회사에서 직원들이 모여 기념 촬영한 것으로, 앞줄 가운데가 당시 사장이었던 김덕부이고 오른쪽이 고태식이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췌.
▲ 1970년대 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모충사(慕忠祠)에서 결혼 기념 식수를 하는 모습이다. 모충사는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에 항쟁하다 순국한 열사와 의녀 김만덕(金萬德)을 기리기 위해 1978년 도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운 사라봉 공원 내에 있는 사당으로, 의병항쟁 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趙鳳鎬) 기념탑, 김만덕 기념탑이 서 있다. 당시 제주시에서는 19
▲ 일본항공인 JAL기에서 내린 일본객 관광객들이 비 내리는 공항을 비닐우산을 들고 걸어 나오고 있다. 모자를 쓴 신사는 우산을 쓰지 않았다. 모두 넥타이를 맨 말쑥한 양복 차림이고, 한결같이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다. 관제 철탑 앞의 부부는 무거운 짐 보따리까지 들고 있다. 1960년대 제주공항에서는 활주로까지 걸어가서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사진으로
▲ 영등할머니라고 부르는 영등신은 음력 2월1일에 들어와서 15일에 나간다고 한다. 우도에 들어와 보말을 까먹으며 제주도의 해변을 돌면서 미역, 전복, 소라 등의 씨를 뿌려 번식케 하고 떠난다고 한다. 따라서 2월1일에는 영등 환영제를 지내고, 같은달 13~15일에 마을별로 날짜를 잡아 영등송별제를 지낸다. 이것을 모두 영등굿이라 하며, 어부나 해녀들의 해
▲ 1950년대 서귀포 수협 자리에서 본 포구의 선착장 모습이다. 저 멀리 문섬이 보이고, 그 앞에 새섬 절벽이다. 대부분의 배들은 닻걸이에 바를 걸어 정박했다. 유독 작은 배 하나만 바다 위에 떠 있다. 항구 앞의 가운데 기와집이 어업조합 건물이었다. 비포장도로를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김홍인 사진)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췌.
▲ 2001년 관덕정 앞에서의 입춘굿 놀이 모습이다. 입춘춘경(立春春耕)이라고도 불린 입춘굿은 탐라국(耽羅國)시대부터 탐라왕이 백성들 앞에서 밭을 가는 친경적전(親耕籍田)의 유습이 조선조에는 왕을 대신해 호장이 '낭쉐(木牛)'를 끌며 농경의 행위를 실연하고 풍농을 비는 거리굿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관민합동 축제였다. 이 날은 전도에 흩어져 있는 심방(무
▲ 성산읍 성산리 해안가에서 자리돔 실은 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자리돔을 싣고 온 배를 마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리돔을 받아가려고 '구덕'(바구니), 대야 심지어 사과상자까지 들고 나왔다. 자리돔을 사고파는 모습이 신기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도 함께 했다. 위쪽에서 모래 장난만 하는 아이들은 다른 세상 아이 같다. '자리'라 일컫는 자리돔
▲ '가는대구덕'을 옆구리에 끼고 집에서 나오는 걸 보니 '먹을 일'이 있어서 다녀오는 길이거나 '먹을 일'이 있어 집을 나서는 모습 같다. 돌담을 높게 쌓은 울타리와 돌집, 초가, 올레, '눌'(가리)이 있는 이곳은 삼도동 병문천 끝의 묵은성 탑알 끝 해안마을이다. '가는대구덕'은 '가느다란 대오리로 엮은 바구니'로, 제주에서는 이웃
▲ 밀물 때의 산지항에 10척 남짓한 배가 들어와 있는 풍경으로, 1890년대에 찍은 사진인 것같다. 항구를 중심으로 집줄을 단단히 맨 초가들이 밀집해 있고, 도로에 지나는 사람들도 보인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제주성의 전체 성곽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치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돗다리'도 보이는데 거기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사진에 배를 대고
▲ 1940년대 제주시 삼양동 송옥수의 결혼사진이다. 남편은 사모관대에 관복을 입었다. 흉배가 호랑이인 것으로 보아 무신을 상징하고 있다. 신부는 원삼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있다. 전통 혼례 사진이다. 뒤에는 낡은 병풍이 둘려쳐져 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제주시 해안동 감귤작목반 창고에서 농림부 국립식물검역소 제주지소 검역관과 미국 동식물검역소 검역관이 함께 검역작업을 벌이고 있다. 미국 동식물검역소는 자국 5개 주의 감귤 주산지를 병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주감귤에서 발생하는 깍지벌레의 일종인 파르라토리아 지지피와 온실가루 깍지벌레, 화살 까지벌레, 감귤 궤양병 등 4종을 검역 대상으로 선정하고,
▲ '빌레못동굴'은 애월읍 어음리 산중에 소재한 용암동굴로 화산활동에 의해 7~8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굴의 총길이는 11만749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로 알려지고 있다. 이 동굴은 동굴이 생겨날 때의 흔적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가 하면, 대륙에서 서식하는 황금곰의 화석이 굴 내부에서 발견됨으로써 제주~육지부의 연륙설을 뒷받침하
▲ 1955년 제주시 칠성통에 '제주관광안내소'라는 아주 생소한 간판이 하나 걸렸다. 이동규(당시 35살)가 관광안내업을 시작한 것인데, 당시 간판을 보고 시민들은 관광안내가 무엇이냐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산지교 쪽으로 옮겨 모슬포훈련소 훈련병들 면회왔던 사람들을 상대로 영업하던 제주관광안내소는 다시 옛 제광교 옆으로 옮기면서 배로 내도한 관광객들
▲ 죽은 사람을 위한 굿으로 망자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닦는 모습을 춤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멍석을 깐 제장에 푸른 대로 아치형 다리를 세웠다. 무당은 신칼을 들고 춤을 추고 있다. '질치기'란 신의 왕림을 위해 길을 닦는 의식을 말하는데, 죽은 귀신을 불러들여 그의 이야기를 듣고 위무하여 저승으로 보내는 길을 치워 닦는 의식을 춤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