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질을 끝낸 해녀가 해녀복을 입은 채 무거운 어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뭍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황소처럼 보인다. 제주해녀들의 삶은 이처럼 무겁고 고달팠다. 비딧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자칫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동반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옛날에는 관에서 요구하는 해산물을 확보하기 위해, 지금은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무거운 짐
▲ 애월읍 하가리 ‘잣동네말방아’에서 소가 끄는 연자매로 조를 찧는 모습이다. 아낙네는 ‘틀목’을 손으로 그냥 밀며 돌리고 있고, 남정네는 ‘틀목’에 채경을 끼워 돌리고 있다. 소고삐를 ‘틀목’에 바투 묶어서 소가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하가리 ‘잣동네말
▲ 1962년 현재의 제주시청 동쪽 밭에서 개최됐던 밭갈이 경진대회 모습이다. 이 일대는 당시만 하더라도 경작지가 대부분이었다. 멀리 별도봉 원경도 포착됐다. 제주도 ‘쟁기’는 경토의 깊이가 얕고 자갈 함량이 많은 제주도 화산토의 물리적 조건에 맞게 만들어졌다. 제주도에는 인력 밭갈이 도구인 ‘따비’도 있었다. 경
▲ UNCACK 제주도팀 의사 듀코프와 의사 김규용이 제주시 미공보원 건물에서 기생충에 관한 공중보건 강의를 하고 있다. 강의를 듣고 있는 이들이 진지하다. 1952년 7월5일 제226통신중대 소속 클리프턴 루이스가 찍은 사진이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제주도에 교통수단으로 여객자동차가 등장한 1925년 2월이었다. 제주동부자동차회사(동부차부)가 설립돼 6인승 포드 합승차량으로 제주~성산포 구간을 다닌 것이 처음이고, 같은 해 2월26일 제주통운주식회사(서부차부)가 설립돼 제주~모슬포 구간을 운행했다. 이듬해 서귀포에 남부자동차회사가 설립돼 서귀포~모슬포, 서귀포~성산포 구간을 운행하면서 일주도로 전
▲ ‘갈옷’은 제주도의 대표적 노동복이다. 지금은 이 갈옷이 새로운 패션시대를 열어가고 있지만 옛날 제주사람들은 한 여름을 갈옷 하나로 지냈다. 이 갈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름철 물이 잘 오른 토종 풋감을 따서 절구통에 놓고 잘 찧어 광목천을 놓고 부비며 물을 들인다. 물들인 천은 돌담이나 풀밭에서 며칠씩 말리는데 새벽이슬을 촉촉히 맞
▲ 해녀들이 물질 장소로 이동하려는 모습이다. ] 두 사람 모두 ‘소중이’로 갈아입었는데, 한 사람은 위에 ‘물적삼’을 더 입었다. 물수건을 쓰고 그 위에 물안경(수경)을 얹었다. 한 사람은 테왁망사리를 어깨에 메었는데, 손에는 ‘본조개(전복의 껍질)’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본조
▲ 신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앞인 남문로 일대를 청소하고 있다. 이처럼 1970년대 초반에는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각급학교 학생들이 아침 일찍 등교해 조기청소를 했다. 당시 학교를 중심으로 아침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새마을 노래
▲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제주도 전역은 일본군에 의해 요새화됐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제주에는 일본군 제58군 소속 6만60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미군이 일본군 제58군의 탱크 등을 무장해제하고 있다. 이 사진은 제주4·3 관련 미국자료 수집 공동 조사반이 미국에서 입수해 공개한 것이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l
▲ 바람 피할 수 있는 담벼락에 앉아 연탄불 위 숟가락에 설탕과 소다를 넣어 만든 여러 문양의 과자를 아이들이 조심스레 떼고 있는 모습이다. 몰려든 학생들이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고, 아기를 들쳐업은 아낙네는 손 바쁘게 과자를 만들고 있는 가운데 한 아이가 열심히 ‘떼기’를 하고 있다. 조심성이 없으면 이내 바스러져 허탈함을 맛보기도
▲ 요즘은 어선조업이 보편화돼 ‘원담’을 이용한 ‘멜(멸치)잡이’를 보기 힘들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해안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제주의 풍물이었다. ‘멜잡이’는 갈치 등의 어류에 쫓긴 ‘멜’ 떼가 해안으로 밀려들어 돌로 쌓은 원담으로 몰려들면 이를 본 주민이 골목
▲ 제주상업고등학교(현재의 제주중앙고등학교) 학생들이 타자 실습을 하고 있다. 몇 학생들은 아직 서툰 듯 이른바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여교사 뒤에서 장난을 치는 학생의 표정이 무척 신나 보인다. 지금은 컴퓨터가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지만, 1980년대까지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주판, 부기와 함께 타자를 필수적으로
▲ 1930년대 광경으로, 돌 틈 사이로 물이 솟아나는 물통에서 물을 긷는 모습이다. 어른과 조무래기들이 어우러진 정겨운 광경이다. ‘물구덕’을 지고 가는 사람, 허벅 부리를 쥐고 물길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 머리 땋은 소녀가 ‘대바지’에 물을 긷고 있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녀, 할머니한테 말을 건네
▲ 미군 트럭이 주차한 곳에 슈샤인보이들이 몰려들었다. 구두를 닦아주는 모습, 흥정하는 모습, 도구를 들고 대기하는 모습 등이 담긴 1954년의 사진이다. 모슬포 지역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슈샤인보이’는 1950년대에 주로 사용된 은어로 “슈샤인 슈샨 보이, 슈샤인 슈샨 보이, 슈 슈 슈 슈 슈산 보이, 슈 슈
▲ 1960년대 한라문화제의 일환으로 열린 탐라미인선발대회에 뽑힌 영광의 주인공들이 트럭을 꽃으로 장식한 꽃차를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동문로터리 주변 거리를 메운 시민들이 흥미롭게 미인들을 지켜보고 있다. 경찰관들이 질서 유지에 나서야 할 만큼 미인선발대회는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1969년 여름의 일주도로 공사 장면이다. 곡괭이와 ‘바지게’ 등을 활용해 공사를 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제주도의 일주도로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관덕정을 기점으로 해 여러 해안 마을을 잇는 총 길이 181.091㎞로 개설됐다. 처음에 6m 너비였던 것이 1925년부터 자동차 통행이 시작돼 너비를 8m로 넓혔다
▲ 일제강점기 때 차량 앞에 선 차량 정비사 모습이다. 차는 포드 자동차로 헤드라이트가 마치 왕눈과 같아 어린이 장난감 자동차 모양을 하고 있다. 자동차 번호판은 ‘전남 786’으로, 제주도가 행정구역상 잔라남도에 속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차량 정비 기술을 보유한 사람은 아주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사진으로 보
▲ 1970년 8월19일 제주시 연동 전기 점화식 모습이다. 단상 위에 원로와 기관장들이 앉아있고 식장에는 어린 학생들이 모여 점화식을 지켜보고 있다. “저축으로 건설하자” “착실한 전진의 해”라는 구호가 선명하다. 연동에서는 1965년 연동전력개발위원회(위원장 김윤식)가 발족됨으로써 전기가설사업이 진행됐다. 그
▲ 예부터 제주도는 물이 귀한 섬이었다. 비는 많이 오지만 금방 지하로 스며들거나 바다로 흘러가버려 물이 항상 흐르는 계곡이 도내에 몇 곳 안된다. 때문에 용천수가 솟아나는 해안가에서 물을 길어다가 먹거나 아니면 마을마다 있는 우물을 길어다 먹기도 했다. 거기다가 제주도는 옛날부터 가뭄이 심한 지역이라 여름철이면 종종 가뭄으로 농작물은 물론 식수마저 어려움
▲ 1970년대의 초등학교 방학식 장면이다. 1학년 어린이들이 생애 첫 여름방학을 맞아 ,방학공부. 책을 들고 환호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남자 어린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자를 쓰고 있으며, 여자 어린이들은 한결같이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남녀 어린이 모두 왼쪽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있다.옷차림으로 보아 제주시내의 초등학생들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