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바다에서 ‘테우(떼배)’로 ‘자리 조업’을 하는 장면이다. ‘테우’는 떼배를 말하고, ‘자리’는 자리돔을 일컫는 제주어다. 제주에서 자리를 잡을 때는 ‘테우·터위·터배·테배’라 부르는 ‘떼배&
▲ 1902년경에 라크루 신부가 개설한 여학당의 27명의 학생들과 여학당 책임자가 소풍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찍는 것이 생소해서인지 여학생 얼굴과 자세가 모두 굳어있다. 제주 본당 제2대 주임이자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라크루(한국명 具瑪瑟, 세례명 마르첼리노) 신부는 1901년 제주민란 후 본당의 정착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 사진은 바닷가 사람들이 '멜'을 뜨기 위해 갖고 나온 어망과 대바구니 등의 도구와 함께 '멜' 뜨는 작업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멜'을 '원담'에서 잡는 것을 제주사람들은 '멜 거린다(뜬다)'고 한다. '원담'은 해안가에 널찍하고 둥그렇게 쌓은 돌담으로 일종의 원시형 돌담 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갈치 등의 어류에 ᑈ
▲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신나게 하고 있다. 지나가는 마차와 삼륜차, 고무줄놀이보다는 사진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어른의 눈매가 이채롭다. 고무줄놀이는 “순이 아버지 담배 공초에 불이 붙어서 으라 차차 으라 차차 순이 아버지” 등의 노래에 따라 정해진 방법으로 고무줄을 다리에 걸기, 넘기기, 밟고 걷기, 뛰어넘기, 물구나무 서서 넘기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3일 제주도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위해 한 소녀가 클라리넷으로 축하연주를 하고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 왼쪽이 한국보육원의 황온순 원장임을 볼 때 소녀는 전쟁고아인 것 같다. 아울러 한국보육원이 미군부대와 같은 울타리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장소는 제주농업학교 자리이며 뒤쪽에서 촬영하는 이는
▲ 1960년대 아기를 업은 한 어머니가 제주시 중앙로를 걸오 올라오고 있다. 아기가 추울까 봐 '뚜데기'(처네)를 탄탄하게 둘러 업었다. 그 뒤를 호주머니에 손을 지른 꼬마가 따르고 있다. 길은 넓혔지만 차도만 포장돼 있는 길을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2'에서 발췌.
▲ 심장이 죽은 영혼을 위무하는 '영게울림'의 한 장면이다. 멍석을 깔아 제장을 만들고, 망인을 위한 상을 차렸다. 왼쪽 깃대가 감상기이고, 댓개비를 얹었다. 심방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 이야기하는 광경을 주위 사람들은 물론 외지인도 사진을 찍으며 관심있게 바라보고 있다. '영게울림'이란 죽은 영혼의 이야기를 심방이 대신해서 말하기 때문에 '영게울림
▲ 1960년대말 촬영한 제주시 건입동 '앞돈지' 소재 서부두의 수산시장 모습이다. 나무로 만든 뱃머리와 허름한 옷차림새의 아낙네들이 고기를 담는 바가지를 들고 서 있다. 널려있는 '각재기'(전갱이)가 이채롭다. 이곳 일대는 지금도 새벽 5시면 새벽시장이 형성돼 수십 명의 상인들과 싱싱한 고기를 싸게 구입하려는 주민들의 흥정이 볼만하다. 현재 제주시
▲ 1960년대 후반, '물적삼'과 '물소중의'를 입은 해녀가 '불턱'에서 불을 피우며 몸을 말리고 있다. 바구니에는 땔감으로 쓸 마른 풀들이 가득 담겨 있다. 불턱은 해녀들의 쉼터로, 대개 바닷가의 오목한 곳에 돌담으로 사방을 빙 둘러쳐서 만든다. 옷을 갈아입고 불을 쬐어 몸을 말리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장소지만, 동네에서 떠도는 소문이나 사건
▲ 1995년 9월5일 서귀포시재향군인회가 ‘양담배 안피우기 캠페인’을 버리면서 학교 운동장에 양담배들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장면이다. ‘서귀포의 양심으로 양담배를 몰아내자’라는 현수막 문구가 인상적이다. 오른쪽의 작은 팻말에는 ‘국산담배 애용’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당시에는 우루과이라운드(UR
▲ 1970년대 애월읍 하가리 마을 안길을 ‘오줌허벅’을 진 아낙네 둘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오줌허벅’ 부리는 오줌이 넘쳐 흐르지 않게 ‘보리낭’(보리짚)으로 단단하게 막았다. 높고 촘촘히 쌓은 돌담과 앙상한 가지를 뻗은 팽나무, 초가지붕, 땔감을 쌓은 거리 등은 농촌의 정취를 잘 보여
▲ 일제강점기 때 한라산 백록담을 찾은 등산객들이 화구 안에서 동쪽 분화구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분화구 안에 물이 고여 있고, 등산할 때 의지했던 나무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 그 옆에 양복 차람의 등산객 모습 등이 눈길을 끈다. 분화구 북쪽 방암(方巖)에는 제주에서 27년 유배살이 했던 조정철 목사 마애명이 있다. ‘사진으로 보는
▲ 1962년 시내버스 등장 이전의 시민교통은 시외버스 운행구간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정도다. 급한 용건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때 부득이 택시회사에 전화를 걸어 호출하는 식이었다. 1962년 최초로 시내버스가 운행할 당시 요금은 1구간 5원, 2구간 7원, 3구간 10원이었다. 하지만 1962년 한일여객이 설립된 이후에도 이용자가 적어 수지가 안맞자 또다른 설
▲ 1970년대 말 서귀포시내에서 한국전력 기술자들이 기존의 나무 전봇대를 콘크리트 전봇대로 교체하는 모습이다. 작업을 하는 광경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주민과 어린이 앞쪽으로 지금은 사라진 도로와 인도를 구분하는 가드레일도 보인다. 나무는 전봇대가 처음 생긴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명실공히 1등 재료였다. 나무 전봇대에 박힌 디딤돌을 밟고 올라가
▲ 1969년 10월7일 제주국제공항 관제탑 앞에서 열린 제주~부산~오사카 간 대한항공 취항 기념식 장면이다. 이 구간의 첫 취항은 오전 10시15분에 이뤄졌다. 제주~오사카 구간의 직행 항로 취항은 1971년 5월5일에 처음 이뤄졌다. 1985년 10월17일에는 제주~도쿄, 1988년 3월28일에는 제주~나고야 국제선 항로가 각각 개설되면서 제주공항이 국
▲ 1970년대의 어느 초가을 무렵 제주북초등학교 어린이들이 텀블링을 하고 있다. 두 어린이가 어깨를 맞잡은 위로 한 어린이가 올라선 모습이다. 위에 올라간 어린이들은 아래 어린이들의 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모두 신발을 벗어 놓았는데, 다소 긴장한 모습들이다. 복장 등으로 보아 운동회 연습을 하는 것 같다. 텀블링은 주로 고학년 남자 어린이들이 맡아 했는데
▲ 화산분출로 이뤄진 제주섬의 토양은 척박하다. 그래서 중산간 마을이나 해안마을 가릴 것 없이 퇴비 확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어촌마을에서 볼 때 해안은 퇴비자원인 해초를 끝없이 만들어내는 공급기지와 같다. 밤새 파도가 밀려오면 해초들을 해안에 쏟아 놓는다. 그러면 부지런한 어촌 사람들은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 해초를 거둔 뒤 등짐지고 집으로 옮겨온
▲ 1960년대 중산간에 설치된 급수전 모습으로 물을 마시는 촌로들과 김영관 지사의 모습이 시대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1940년대 초반만 해도 제주에는 상수도 시설이 없었고, 더구나 중산간 마을에는 용천수마저 없어 장구벌레가 우글거리는 봉천수와 개울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당국에서는 봉개·도련 등에 그나마 위생적인 급수전 시설을
▲ 화산섬으로서 토양이 척박하고 바람이 드센 제주에서는 보리나 조 등 밭작물 농사는 육지부와 달리 이뤄졌다. 제주에서의 퇴비는 마소들이 겨우내 머무는 외양간 못지않게 ‘돗통시’에서 나오는 ‘돗거름’ 비중이 만만치 않았다. 한 계절 마소들이 머물며 겨우내 배설하는 우마분과 짚을 자연발효시킨 뒤 밭이나 과수원 등에 뿌
▲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싱그럽다. 1950년대 중반 제주시 삼도동 한 주택 난간 앞에서 제주도 최초의 약방인 제일약방을 운영했던 김태환(작고)이 촬영한 사진이다. 하얀 저고리를 입고 앉아 있는 이는 김태환의 장녀 김행자(1943년생)이고, 그 왼쪽이 여동생 김정자(1945년생 작고)다. 맨발로 서 있는 남자 아이는 막내아들 김창희(1952년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