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 남자들의 '광(狂)' 이야기 <야구>

# 야구광이 말하는 야구가 좋은 이유

혹자는 세 시간이 넘어서 지루한 경기라지만, 세 시간 동안 인생의 파고를 짧게 요약한 드라마는 ‘야구’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야구는 더더욱 흐름의 싸움이다. 1회부터 9회까지 이어지는 데다 매회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야 끝난다. 경기 시간도 세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이런 특성 탓에 흐름이 수시로 왔다갔다할 수 있다. 흐름이 왔을때 반드시 잡아야하고, 잡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흐름이 넘어가면 가급적 빨리 뺏어야 한다.

투수가 던지는 공 한 개가 그래서 중요하다. 잘못 던진 공 하나가 모든 흐름을 좌우하는 것이 야구다. SK와이번스의 명장이자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의 명언. ‘일구이무(一球二無)’가 이를 상징한다. 삼세번도 없고, 두 번도 없다. 한 번 던진 공으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난 순간 작은 세상 하나가 창조된다. 타자가 치는 공 하나에도, 수비수가 잡는 공 하나에도 ‘다시’는 없다. 공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고, 진정 최선의 플레이를 해야한다. 이는 곧 우리가 인생을 사는 순간순간이 ‘다시’는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야구는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끝나는 스포츠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신인투수라 한들 홀로 외롭게 서있는 마운드에서 몇 만 관중의 응원압박을 이겨내 포수 미트에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배짱이 없다면 분명 실패할 것이 뻔하다.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면 연속 ‘포볼’을 내줘 주자를 내보낼 수 밖에 없고, 더 큰 실점을 초래하게 된다.

어떻게든, 어떤 상황이든, 타자가 강하든, 약하든, 홈런 맞을 것을 각오하고 스트라이를 꽂아야 실점을 최소화할 수 있다. 홈런을 맞아야 삼진을 잡을 수 있다. 훌륭한 투수와 타자는 많이 실패하고, 이를 이겨낼 수록 더 크는 법이다.

결국 사회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명민한 재능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스트라이크를 던질 ‘배짱’과 ‘도전정신’이 없다면 실패한다는 교훈을 야구에서 얻을 수 있다. 비록 홈런을 맞아 실점을 내줘도 어떻게든 스트라이크를 던지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마운드에서 성장할 수 있다.

야구광은 오늘도 야구에서 인생을 배운다. 살면서 두려워 포기하고 싶을 때, 잘 될까 의심할 때, 결국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는 결론으로 매듭짓는다. 홈런을 맞은 안타를 맞든, 삼진을 잡든 공을 던져야 결과를 알 수 있다. 세 시간의 극적인 인생 드라마. 야구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야구광의 증상들

1. 4월~11월 웬만하면 저녁에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야구에 빠지면 연애가 쉽지 않다. 한창 시즌이 시작되는 4월~11월까지 어떻게든 야구경기가 열리는 시각에는 야구를 봐야한다. 인맥도 자연스레 끊게 된다. 오직 내가 알고 있는 네트워크는 야구선수들과 매일 시시각각 변하는 기록들이다. 이러다보니 평일이고 저녁이고 집에 앉아있을 수 밖에 없다. 연애가 될리 만무하다. 여자친구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심정까지 든다.

2. 선수들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선수가 오늘은 홈런을 몇 개 쳤고, 삼진을 몇 개 잡았는지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관리해야 할 데이터가 된다.

잘 나가던 선수가 왜 갑자기 난조에 빠졌는지 같이 고민한다. 부상이 왔을까, 몸의 밸런스가 무너졌나. 심한 부부싸움을 했나, 구단과 갈등이 있나 등. 내가 좋아하는 팀의 선수라면 내 가족만큼 몸 상태와 기록을 신경쓴다. 심해지면 그 선수의 계약금과 연봉까지 관리한다.

어느덧 선수들의 동향에 통달하면 각 구단에서 어느 선수가 어디로 이동하고 연봉을 얼마정도 받을 것이며, 몸 상태가 이러니 제대로 역할을 할지 말지 등의 전망까지 내놓는 경지에 이른다.

3. 어느덧 해설가의 경지까지 도전하게 된다.

사람 욕심이 그렇다. 모든 경기의 흐름을 통제하고 싶어진다. 자신이 하일성, 허구연도 아닌데 괜히 이런저런 전망을 늘어놓는다. 우연히 들어맞다 싶으면 의기양양해지고 마음이 뿌듯해진다.

저 타이밍에선 무슨 구질의 공을 던질거야, 무슨 공을 공략해야지, 점수를 뽑기 위해선 이런 전술을 써야지 등. 각종 데이터와 전술, 전략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그러니 공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제주도민일보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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