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돈 <제주대 철학과 교수>

▲ 김현돈 교수
쳐부수자, 무찌르자, 타도하자는 청유형 반공구호가 방방골골 메아리치던 그 시절, 박노식·황해·장동휘·이대엽 등 우리가 열광하던 전쟁영화의 단골 주역들은 죽음조차도 멋있었다.

귀신 잡는 해병, 오인의 해병, 피아골의 신화 같은 무수한 6·25 전쟁영화들.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비오듯 쏟아지는 총탄을 용케 뚫고 적진을 돌파하던 국군 아저씨들의 용감무쌍함에 반공병영국가의 학도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전우의 품에 안겨 안주머니에서 신혼의 아내나 애인의 사진을 꺼내 보이며, 조국을 위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노라, 전해 달라며 유언을 남기고 할 말을 다하면 숨이 넘어갔다. 그 판에 박은 설정에도 우리는 분루를 삼키며 가슴 가득 치오르는 적개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우리 편=국군, 나쁜 편=괴뢰군으로 간명하게 도식화한 전쟁영화의 서사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공냉전 이데올로기에 스스럼없이 세뇌되었다.

세련된 드라마, 가려진 처참함

옛날 반공도덕 교과서에 실렸던 한 장의 사진이 희미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흰 띠를 두른 교모와 교복을 입은 앳된 학생들의 사진 아래에는 ‘용약 출정하는 학도 의용군’이란 설명이 씌여 있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책 대신 총을 잡게 했을까.

그들은 살아서 학교에 돌아갈 수 있었을까. 희미한 사진 속의 주인공들이 영화 ‘포화 속으로’로 들어왔다. 탄우와 작열하는 포화 속을 뚫고 그들은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영상으로 현신했다. 제작비 113억원의 세련된 전쟁 블록버스트였다. 총탄을 퍼붓고 포탄이 터지고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지는 가공할 씬들은 형식미로서는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71명의 학도병들은 낙동강 전선으로 긴급 투입된 국군들로 공백이 생긴 포항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는다.

영화는 롱숏으로 전장의 스펙타클한 영상미를 보여주다가 잦은 익스트림 클로즈업 숏으로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하는데, 갑조와 정범은 사사건건 부딪히고 갈등하지만 결국 하나로 뭉쳐 적에 대항하다 모두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전쟁은 왜 하나요?”라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전쟁에 대한 회의를 떨치지 못하는 정범, 인민군 소년병을 저격하려는 갑조와 이를 만류하는 정범, 포로로 잡힌 학도병을 처형하려는 정치보위부 장교에 맞서 포로를 적진에 데려다주고 최후의 담판을 짓는 인민군 박무량 소좌의 인간적인 케릭터에서 영화는 잠시 반전과 반공 사이에서 주춤거리지만, 라스트에서 보듯이 학도병의 최후 결사항전과 인민군대의 잔인한 공격, 지원군으로 급파된 강석대의 박무량 사살 등에서 영화는 반공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영화는 지금까지 익히 본 수많은 국내외 전쟁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영화에나 있을법한 대책 없는 전쟁광(갑조)과 휴먼드라머의 주인공 정범의 대립구도, 하지만 끝내는 공동의 적 앞에서 눈물로 화해하고 단합을 과시한다든지, 전우의 죽음 앞에서 비분강개해 물불 안 가리고 적을 향해 돌진한다든지 하는 씬들이 그렇다.

현실의 전쟁은, 공멸

영상미디어로 재현된 전쟁은 멋있다. 그러나 전장은 인간의 양심을 괴멸시키고, 인간성을 극도로 황폐화시키는 폭력과 죽음의 아수라장일 뿐이다.

아름다운 전쟁도 정의로운 전쟁도 없다. 전쟁은 그 자체로 추악하다. 정부여당과 군수뇌부, 국방부는 과학적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 천안함 사건 결과를 발표해놓고, 경계의 실패를 모면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찾아 전쟁불사를 외치며, 모든 비판적 논의를 틀어막고 있다.

군인정신은 간 데 없고, 비열함과 용렬함만 남았다. 이들에게 우리 아이들의 국방의무를 맡겨도 좋은가. 냉정하게 돌아보라.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민족의 공멸을 불러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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