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승훈 칼럼] 바다색의 사전적 의미는 ‘바닷물의 빛깔과 같이 녹색을 약간 띤 파란색’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최신판에서는 삭제된 단어인 ‘바닷빛’은 ‘멀리서 바라본 바다와 같이 푸른빛’이라고 한다. 이처럼 바다색은 깨끗한 느낌의 ‘파랗다’와 시원한 느낌의 ‘푸르다’로 통용된다. 그러나 이는 바다색에 대한 보편화된 표현일 뿐, 특정 색을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다.

# 제주의 바다빛은 변화무쌍(變化無雙) 그 자체다

제주의 바다 빛이 그렇다. 파랗고 푸른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제주의 바다색은 팔색조(八色調)다. 제주의 바다색은 햇빛의 반사 각도에 따라, 또는 대기 중의 습도 차로 인해, 그리고 계절마다 혹은 밀물・썰물의 차 때문에, 똑같은 바다라고 하더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다색이 바뀌고 분위기도 다르다.

같은 빛깔이라 하더라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제주의 바다빛은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다. 물론 주관적이고 취향의 차일 수 있다.

제주에서 물빛이 가장 좋다는 한림읍 협재・금릉 바닷가. 눈부신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 그리고 화산섬 ‘비양도’는 덤이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를 가졌다.

[제주도민일보DB] 제주시 한림읍 협재 해변.

# 연초록, 유록색, 갈매색…‘곶자왈’을 품은 제주바다

6월, 지금 이 맘 때 이 바다는 연초록이다. 자연의 붓질이 웅혼하게 연초록을 그려 놨다. 눈부시고 아름답다. 마치 중산간의 ‘곶자왈’을 품은 듯하다. 바닷물을 꼭 쥐어짜면 연초록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물빛 좋기로는 타이티나 몰디브 못지않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게 어디 연초록이냐고 반박한다. 연한 옥빛이라고도 하고, 갈매색, 유록색, 엷은 아쿠아, 코발트 블루도 들먹인다.

그러나 이런 단어 하나로 색의 미묘함을 표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연초록이 이 시기 가장 아름다운 빛깔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제주도민일보DB] 서귀포시 성산읍 광치기 해변.

# 일출・일몰의 제주바다, 쉼표가 되고 성찰이 되다

성산 일출의 바다. 어둠을 가른다. 먹빛을 가르며 붉고 푸른빛으로 일렁이는 그 바다는 이 세상 어느 보석보다 눈부시다. 멀리, 바다 위 어선들의 통통거림이 정적을 깬다. 부산하다. 만선(滿船)을 꿈꾸는 그 바다는 희망이 바다다.

제주의 서쪽 끝. 한경면 고산리 차귀도는 홍차 빛의 일몰이 아름다운 바다다. 온 종일 제주를 비추던 햇살은 섬 한 바퀴를 돌아 이곳에서 한껏 기울어져 미련 없이 바다로 떨어지면서 황홀경을 연출한다.

일출과 일몰의 제주바다, 그 바다는 순간 쉼표가 되고 성찰의 공간이 된다.

가을이다. 맑은 건 하늘만 아니다. 바다도 가을의 서정에 담는다. 자연이 정한 하늘과 바다의 경계만 있을 뿐이다.

안덕면 사계리 ‘절잔개’ 조간대. 아늑한 파도에 하얀 백사장은 가을 햇빛을 받아 은빛이다. 이제 이곳에는 더 이상 ‘별의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자’던 열정의 바다는 없다. 대신 차분한 안정과 성숙함이 있다.

‘절잔개’ 바로 앞에는 형제섬이 떠있다. 섬에서 섬을 볼 수 있는 것도 색다르다. 섬도 계절을 탄다. 어느 덧 높아진 하늘과 짙어진 바다의 짙푸른 색조에 둘러싸인 가을의 섬은 고독과 청아함이 있다.

[제주도민일보DB] 가파도에서 바라본 한라산.

# 텅 빈 바다, 바다는 겨울에 가야 제대로 보인다

바다는 겨울에 가야 제대로 보인다. 텅 빈 바다, 세찬 파도. 바다는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야 바다는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윽하다. 해안선의 실루엣도 제대로다.

구좌읍 김녕리 바닷가. 텅 빈 백사장과 흰 포말, 코발트빛 바다, 그리고 무채색 하늘. 담백하다. 마치 동양화의 여백을 보는 듯하다. 바다 물결도 연중 이 맘 때가 가장 투명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본다. 걷기의 다급함만 없다면, 잠시나마 세상 욕심과 허황된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봄기운이 무르익을 무렵, 제주 바다는 청동 빛이 된다. 시리도록 푸르다. 아무리 바람이 매섭고 파도가 거칠어도 봄기운을 막을 수는 없다. 바다가 지닌 포용력과 너그러움이 있다. 물오른 봄 바다에서는 톳이 나오고, 연둣빛 감태가 푸름을 더할 것이다.

제주의 바다색은 계절 뿐 만아니라, 바다 바닥이 암반인 ‘걸바당’이냐, 아니면 개흙이나 모래가 깔려있는 ‘펄바당’이냐에 따라서도 색을 달리한다. 수심 영향도 있다. 물이 깊고 낮음에 따라 쪽빛에서 짙은 감청색으로 물빛이 확연하게 대비된다.

제주의 동쪽 끝, 소섬 바닷가. 썰물 때면 드러나는 속살 풍경, 흑백이 교차한다. 우도면 천진리의 서빈백사(西濱白沙). 하얀색의 홍조단괴((紅藻團塊) 해수욕장이다. 반면 우도봉 아랫마을 영일동의 ‘검멀레’는 검은 모래 바닷가다.

[제주도민일보DB] 배에서 바라본 고산기상대.

# 일망무제, 한동안 난 왜 저 바다를 잊고 살았을까?

제주 바다는 해가 져도 눈부시다. 갈치와 한치, 멸치 어장이 형성되면, 제주바다는 집어등(集魚燈)을 대낮 같이 밝힌 어선들과 은빛 물결로 들썩인다.

밤바다 고기잡이는 달빛 없는 때가 가장 좋다. 달빛 일렁이는 보름 전후는 집어가 용이치 않다. 유가 급등 탓에, 집어등이 예전의 ‘메탈할로이드’에서 고효율 발광다이오드(LED)로 바뀐 탓도 있겠지만,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은빛 물결은 더욱 빛난다.

남원읍 남원1리 ‘큰엉’ 조간대는 바람에 깎이고 파도가 후벼놓은 기암괴석이 장관이다. 시인 김순이의 표현을 빌자면 ‘소름끼치는 아름다움’이 있다.

좌승훈 주필.

어느 한순간도 숨죽이기 못하고 들썩이는 검은 바다. 그리고 숭숭 구멍이 난 현무암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요란하다.

억눌렀던 감정도 자유와 해방감에 파도처럼 꿈틀꿈틀 댄다. 날 것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제주바다. 한동안 난 왜 저 바다를 잊고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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