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사람> 60년만에 ‘내 언니’ 품에 안는 김정순씨

어제 염색을 했다고 했다. 갓 손질한듯한 수많은 파마 ‘알’들이 머리위에 곱게 자리하고 있었다. 67세의 김정순씨는 29일 서울로 출발한다. 그리곤 60여년만에 언니를 만나는, ‘어이없고’ ‘황당하지만’ ‘너무나 기쁜’ 역사적인 자리에 선다.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추석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언니(김연순씨·73)가 북쪽에서 먼저 만남을 청해왔다. 모두가 놀랐다. 그 무렵 김씨네 가족은 추석을 앞두고 “이제 그만 언니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언니가 죽은 줄 알았다. 북에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 제주에 살고 있던 10살 소녀가 물건너 산넘어 북한으로 넘어갔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오는 30일부터 2박3일간 진행되는 2010년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는 제주에서는 모두 세 가족이 이름을 올렸다. 그중 한 가족이 김씨네다. 처음 제주에도 이산가족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자는 이북 출신의 가족이 제주로 내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순수 제주의 토박이들. 김씨의 언니를 북으로 올려보낸 것은 다름아닌 4·3의 광풍이었다.

 

△ 제사지내자 했더니 북에서 연락이

“우린 도두리에 살았어. 아버지, 어머니, 큰언니, 오빠, 나 이렇게 다섯 식구. 그런데 어느 날, 큰집에 남자들이 들이닥치니까 어머니가 큰집 아들을 데리고 도망을 쳤는데 그게 걸려서는 우리 어머니와 큰집 아들, 할머니까지 모두 죽임을 당한 거야. 시체는 이호천 냇가에 갔다 버렸대. 그냥 돌로만 대충 쌓아뒀고. 나중에 가봤더니, 벌레가 우글거렸다고 하더라고. 어머니 죽던 날 비가 굉장히 많이 왔는데 난 뭣도 모르고 장난치고 놀았다네.”

그 길로 아버지는 자식 셋을 데리고 한라산으로 올랐다.

“피난을 간 거지. 그때 큰 아버지가 한라산에 왜 가냐며 말렸던 기억이 나. 아버지는 오빠를 업고, 언니는 나를 업고 갔어. 힘이 드니까 내가 미웠던지 언니가 내 다리를 꼬집어서 울었던 기억도 있어. 그때 내가 네살쯤이었고, 날이 막 추워질 무렵이었어”

김씨네 가족은 아무도 없는 굴에서 무작정 사람을 피해 있었다.

“산에는 돌들로 막아진 곳들이 많잖아. 그런 곳에 숨어 있었어. 주먹밥이랑 먹을 것들 조금 가져간 걸로 배를 채우면서 몇달을 산에 있었어. 그런데 이상한 건 그때 동굴에서 언니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없는거야. 분명 산에 올라갈 때는 언니 등에 업혀 같이 올랐는데, 산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왜 아버지와 오빠 기억은 있는데 언니는 없는지. 어릴 때라 기억이 드문드문한데, 아마 내 기억이 끊긴 지점에서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어떻게 북한까지 갔는지. 만나면 그걸 꼭 물어보고싶어”
 

△ 고난사의 서막

그러던 어느 날, 총을 맨 사람들이 김씨의 가족을 발견했다. 그리곤 가족 모두 시내로 끌려 내려왔다. 그때에도 언니의 모습은 기억에 없다. “끌려 내려와서는 어딘가에 갇혔어. 거기서도 몇달을 지냈어. 친척들이 면회 오기도 했고. 거긴 사람들이 많고 좁았어. 더워서 막 울었던 기억이 나”

그런데 그 울음이 김씨와 김씨의 오빠를 살렸다. 누군가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느냐 물었다. 아버지는 이호동에 이모네가 있다고 했고 김씨와 김씨의 오빠는 수용소에서 나와 이모네로 가게 됐다. 그후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갓난 아이에도 총질을 해대던 세상에, 김씨 남매는 천운으로 목숨을 구했다. 네살, 일곱살난 남매가 부모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친척들도 김씨 남매를 마냥 반기지는 못했다. 큰집과 이모네가 있었지만 김씨 남매는 곧 홀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땐 일거리도 없었다. 큰아버지는 남의 집 식모로 김씨를 보냈고, 그럴때마다 김씨는 큰아버지가 집에 오기도 전에 다시 돌아와있곤 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이번엔 소섬(우도)으로 데려갔다. 혼자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그곳에서 12살까지 살았다. 물질도 하고 밥도 했다. “도두에 살땐 한라산을 보고 집을 찾아갔는데 소섬에서는 한라산이 바로 앞에 있으니 집을 찾아갈 수가 있어야지”

그리곤 부산으로, 인천으로, 서울로 50년을 타향살이하고 2년전 제주로 다시 돌아왔다. 오빠는 오빠대로 한평생 고생길이었다. 머슴살이로, 트럭조수로 고된 일만 찾아다녔다.
 

△ 그 숱한 세월, 만나면 무슨말 해야할까

현재 오빠(김석진씨·70)는 이호동에, 김씨는 대정읍 하모리에 살고 있다. 지난 추석이후 대한적십자사에서 언니의 사진을 들고 오빠네 집을 두어번 찾았었지만 김씨는 번번이 간발의 차이로 직원을 만나지 못했다. 언니의 사진을 한번도 보지 못한 셈이다.

“언니랑 놀았던 기억은 나. 고구마가 생기면 언니는 도두 장에 가서 팔곤 했는데, 오빠와 내가 그걸 어머니 아버지에게 고자질해서 여러번 언니가 혼난 적이 있지. 언니가 있었으면 우리 남매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살진 않았을텐데. 조금 더 의지하고 모여살며, 어떻게 살았어도 지금보단 낫지 않았을까. 언니 만나면 그것부터 꼭 물어볼거야. 같이 산에 올랐는데, 언제 어떻게 북한으로 가게 됐냐고 말이야”

이번 상봉에는 김씨와 김씨의 오빠, 그리고 김씨 오빠의 아들과 손자가 동행한다. “통일이 될까봐. 우리야 곧 죽고 없어지겠지만 혹시 통일이 되면 장남과 장손이 잘 봐뒀다가 나중에 후손들끼리라도 보고 살라고”

인터뷰가 끝나자 김씨는 곧 장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내복을 산단다. “선물 목록이 몇개로 정해져 있더라고. 내복, 비누, 치약, 설탕, 잠바 뭐 이런것들. 제주시 오일장이라고 오빠가 산다는 걸, 내가 말렸어. 싼 거 사지 말라고. 좋은 걸로 내가 사서 가겠다고. 누구는 빼앗길 지 모르니 좋은 물건 사갈 필요없다고도 하는데, 또… 그말이 맞는 것도 같은데, 내 마음이 그렇지가 않네”

글 문정임 기자 사진 박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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