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실 할머니, 남편 사촌 3명 식게 모신지 20년…”같은 날 군경에 학살당해”
시어머니 돌아가신 20년 넘게 사촌 식게 모시는 할머니 ‘가메기 모른 식게’④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신주실 할머니가 식게(제사)상을 준비하고 난 뒤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날을 기억하며 눈물을 보이고 있다.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반 세기가 훌쩍 넘었음에도 아직까지 그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잠도 쉽게 이루지 못한다. 매년 이 맘때가 다가오면 더 그렇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신주실 할머니는 남편의 사촌인 김철리(40), 김원국(22), 김형국(18) 씨의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남편의 사촌들은 군경에 의해 한날 한시에 목숨을 잃었다. 할머니는 그날 ‘학살당한’ 사촌들의 제사를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지금까지 20년동안 지내오고 있다. 남편 사촌형제들은 자손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돌아가신 김철리 씨는 약혼하고 결혼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10살이었던 신주실 할머니는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기억했다.

“총을든 경찰이 집으로 막 처들어오더니 무조건 나오라고 했어. 그래서 어떻게 해, 영문도 모른채 끌려 나왔지 뭐. 그리고 밭으로 끌려 갔어. 가보니 남자들이 줄줄이 묶여 있더라고. 그리곤 총소리가 울리더니 결국…” 할머니는 눈을 꾹 감았다. 

“폭도로 몰아 붙이더라고. 한, 두시간만에 돌아와 보니 집은 불에 타 없어져버렸어. 남자를 다 죽여버렸으니 여자만 살아 남은거야” 할머니를 비롯한 당시 남은 사람들은 가족 시체를 찾아왔지만 봉분을 세우지도 못하고 고작 거적으로 덮어 장례를 치렀다.

살아남은 할머니 가족은 창고에 살기 시작했다. 이후 움막을 지었다. 김녕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닐때 일이 터졌으니 다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사치였다.

19살에 이 집안에 시집을 온 할머니는 말도 못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 남의 집을 빌어서 살다가 남편이 일본에서 돈을 벌어와 지금의 집을 마련했다. 딸 3, 아들 2을 낳아 밭일, 바닷일을 해가며 억척스럽게 살았다. 죽지 않으려 일을 했다.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도 불구, 잘 커준 자식들에게 한 없이 미안하고 고맙다.

신 할머니는 “그 때 일을 어떻게 말로 다해. 그 이후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며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이렇게 커준 자식들을 보면 고맙고 또 미안하지…”라고 눈물을 훔쳤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신 할머니는 현재 큰아들 김창수, 둘째아들 김병수 씨와 같이 살고 있다. 둘째딸인 김미선 씨는 일본에 있다. 막내딸 김희선 씨는 제주시에 살고 있다. 이날 막내딸인 김희선 씨도 남편과 같이 제사를 모시러 왔다.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다. 걷는 것도 힘들어 이제는 제사음식 준비도, 차리는 것도 혼자의 힘으로는 버겁다.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조천읍 신흥리에 사는 큰딸 김동애 씨(55)가 매년 음식준비를 돕는다. 

큰딸인 김동애 씨는 “매년 찾아오는 식게(제사)지만 해가 갈수록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서 매년 와서 음식준비를 같이하고 있다”고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을 표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신주실 할머니의 큰 딸 김동애 씨.

이날 식게(제사)를 위해 마을 할머니들이 오고 갔다. 그날의 기억을 돌아보거나 그동안의 세월을 이야기 나눴다. 이날 식게(제사)가 한 가정, 가족만의 일이 아닌 동네 전체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또 다른 집으로 갔다. 간간이 찾아오는 주민들은 집에 들어서자 마자 식게(제사)상에 봉투를 올리고 묵념 또는 절을 올린 뒤 밥을 먹거나 차를 마셨다.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딸들은 식게(제사)상에 올릴 음식준비에 바빴다.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손님들이 남기고 간 음식 그릇을 설거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에 묻은 물기를 희고 깨끗한 행주로 닦아냈다. 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기가 늘 해오던 일 처럼 묵묵히 일을 처리해 나갔다. 폭설로 정전이 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오랜만에 보일러를 틀었는데 방이 따뜻하지 않다는 걱정도 오갔다.

신 할머니는 내심 말을 하지 않지만 사촌들의 제사를 아들이 받아줘서 내신 고마운 눈치였다. 그래도 큰 아들인 김창수 씨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있을 때는 제사를 모시겠지만, 우리 아들세대에는 어떻게 할지…”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신 할머니는 “사촌들의 식게(제사)를 후손들이 챙기는데 직계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행정, 재정적 지원을 해주지 않아 아쉽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밤 9시 20분이 넘었다. 압력밥솥에서 ‘칙칙’소리와 함께 밥이 다 되감을 알리고 있었다. 할머니를 비롯해 아들 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 졌다. 7시쯤 외출에 나섰던 둘째아들 김병수 씨가 9시 30분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밤 10시. 남성들이 제사상에 밥과 국을 올리고 절을 했다. 제사를 모시는 동안 온 마을이 고요해 졌다. 근래들어 보통 10시면 제를 끝내기 때문이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막내 딸 김희선 씨의 사위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식게상에 술잔을 올리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모습.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식게상에 밥을 올리고 있는 큰아들 김창수 씨.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큰 딸 김동애 씨가 식게상에 올릴 밥을 담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막내딸 김희선 씨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정리하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제 파지 시간이 다가오자 분주해진 할머니.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세 모녀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큰 아들 김창수 씨.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주민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막내딸인 김희선 씨가 들어오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식게상에 오른 나물에 젓가락을 올리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이웃에게 나눠줄 '반'을 준비하고 있는 할머니.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할머니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이야기 나누다 주방을 바라보는 할머니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식게상에 봉투를 올리고 있는 주민.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식게상 모습.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절을 올리고 있는 남성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향을 피우고 있는 김창수 씨.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절을 하고 있는 모습.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식게음식을 올리고 있는 김창수 씨.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제사를 마친 뒤 김창수 씨가 제사 음식을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 [제주도민일보=최병근 기자] 동복리 마을 전경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