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자‧김장웅 부부의 가슴 아픈 이야기, “그날을 어떻게 잊겠어”
집은 모조리 불타고 남자들은 모두 학살…‘가메기 모른 식게’ ③

▲ 식게 상의 모습[사진=홍희선 기자]
[제주도민일보=홍희선 기자] “아가씨, 옛날이야기 들으려면 눈물 한 바가지 쏟아야 하는데 들을거야? 7살 때인데도 기억이 생생한걸 보면 그 어린애가 어떻게 기억했는지 모르겠다”고 운을 떼고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는 듯 생생하게 그날 그 상황을 차근차근 읊었다.

1949년 1월 17일, 당시 7살이던 고순자(74)할머니는 이날을 잊을 수 없다.

“엄마, 18살 오빠, 그리고 나 3명이 사는데 매일 낮에는 경찰이 와서 폭도들과 동행하지 마라, 밤에는 산에서 폭도들이 와서 동행하자를 반복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오빠는 집을 도망치듯 떠났다. 그가 향한 곳은 목포였다. 경찰은 할머니를 가만두지 않았다. 경찰은 할머니에게 “해안이 봉쇄됐는데 어떻게 갔느냐, 폭도에 동조하는 것 아니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던 중 터질게 터지고야 말았다. 1949년 1월 17일 오후 6시쯤 “동복리민은 전부 나오라”는 군경의 말에 엄마를 따라 동복리에 ‘굴왓’이라는 큰 밭으로 끌려갔다. 현장은 참혹했다. 바로 학살이 자행된 것이었다. 경찰은 남자들을 일렬로 세웠다. 그리고 총을 겨누었다. 이윽고 방아쇠가 당겨지자 ‘탕, 탕, 탕’하는 소리가 하늘을 갈랐다. 남자들이 그렇게 꼬꾸라졌다.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경찰은 모든 집을 불태웠다.

엄마 등에 업혀서 학살 현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기댈 곳이라곤 집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집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진 상태였다.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여기로 못가겠어. 우리 바닷길로 돌아가서 집 찾아가자”고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바닷길로 돌아갔다. 엄마 등에 업혀있었는데도 너무 무서웠다. 그대로 엄마 등에 오줌을 싸버렸다.

우여곡절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엄마는 이불하나, 보리쌀과 좁쌀을 조금 챙겨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이 개별적으로는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산사람’과 내통할 까 봐 서였다. 날이 밝자 김녕 마을회관으로 갈 수 있었다.

이튿날 낮 12시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시간이 지나니 배가 고팠다. 엄마가 “고구마 말랭이라도 집에 있던 것 가져올 걸”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엄마에게 배가 고프다고 발악했다. 철이 없었던 것이었다.

▲ 27일 오후10시쯤 파제를 진행하고 있다.[사진=홍희선 기자]

그래도 오후 2시쯤 되니 김녕에 시집 가 있던 사촌언니의 시어머니(사돈)가 보리쌀, 좁쌀, 팥을 섞어 밥을 해 왔다. 반찬은 배추김치가 전부였다. 그것도 호사였고 사치였다. 밥을 먹고 사돈집으로 가서 2~3일 머물다 집을 얻어서 그곳에서 나오게 됐다.

할머니는 아직까지 엄마를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나마 제 나이에 마칠 수 있도록 모든걸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김녕초등학교 28회 졸업생이다. 동복리 졸업생 가운데 혼자가 여자였다. 이후 중학교를 더 다닐 처지가 못 됐다. 중학교는 포기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해서 였을까. 지금은 글을 읽을 수 있어 은행도 혼자갈 수 있고 생활에 지장이 없다. 이렇게 키워준 엄마가 참 고맙다. “진짜 그땐 살암시난 살아점주(목숨이 붙어있으니 살았지” 그래도 너무 어려웠다.

고순자 할머니의 남편인 김장웅 할아버지에게 그날(제주 4.3)의 기억은 흐리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이 돼서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4.3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집도 터도 없었다. 김녕에 유학 갔다 동복리 집에 다시 오니 아버지가 안계셨다. 한국말을 잘 하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생사유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신걸 뒤늦게 알게 됐다. 어머니는 아들 둘을 어렵게 키웠다.

지난달 27일은 60여년 전 음력 12월 19일 돌아가신 김장웅 할아버지 아버지의 기일이다.

▲ 27일 오후10시쯤 파제를 진행하고 있다.[사진=홍희선 기자]

고순자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만 80세 이상 4.3유족들에게 매월 5만원씩 지원되는 생활보조비를 받을 수 있도록 나이를 낮춰 줬으면 하는 바람을 보였다.

고순자 할머니는 “아들, 딸들이 당시 33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에 큰 금액은 아니지만 생활비가 보조되면 4.3사건이 역사책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에겐)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라고 더 가깝게 생각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4.3유족 생활지원비는 제주도 조례에 따라 지난 2011년부터 지급되고 있다. 명목은 난방비 형태로 전액 지원되고 있다. 매년 그 인원이 늘어나 2015년 말 기준 지원 받는 대상이 2200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제주도 관계자는 “도의회에서도 생활보조비를 받을 수 있는 나이를 낮추자는 이야기가 간혹 나오고는 있지만, 매년 인원이 증가하는 추세로 지방재정에 부담이 늘고 있다”고 밝혔다.

▲ 김장웅씨의 아들·손녀들이 식게가 끝나고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제사가 끝나고 반기를 챙기고 있다.[사진=홍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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