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메기 모른 식게’...4.3 겪은 동복리 김용택 씨의 가슴 아픈 사연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김용택 씨가 식게상에 술잔을 올리고 있다.
[제주도민일보] “4.3. 생각하고 싶지를 않아. 내가 10살 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 어린 날 겪은 처참한 기억을 70년 가까이 안고 산 김용택 씨의 눈시울은 금방 붉어졌다.

지난 4.3사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모인 이들 모두 참혹했던 그 날의 아픔을 꺼내기가 쉽지는 않아 보였다.

‘동쪽에 복이 넘쳐나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동복리는 68년 전 이날, 온 마을을 뒤덮었던 처절한 죽음들로 인해 통곡의 땅이 돼 버렸다.

어린 날의 기억이지만 끔찍했던 그날은 80평생 그 어떤 기억보다도 뚜렷히 각인돼 있었다.

“군인들이 와서 많이 죽였지. 군인들이 길 위에 불 질러 불고 우리 마을로 넘어와 한 군데 모이라고 해서 학교 운동장 다 모이니까...나는 내 앞에서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은 걸 목격한 사람이야. 내 아버지는 처음엔 살았는데 군인들이 재차 죽었는지 확인하고 죽여버렸어. 처음엔 엉터리로 쐈지만은 확인하라 하니까 확인해서 다 쏴버렸다. 내가 열 살 때..”

어머니와 할머니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소년은 사람들이 학살 당하는 그 현장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했다.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김용택 씨 일가족.

그날의 기억은 제사집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이어 이 집 며느리로 시집온 누이 집에 잠시 와 있던 김대규 씨가 말을 이었다.

“내력을 알아보면 동복하고 김녕 사이에 굴이 하나 있어. 거기에서 밤에 폭도들이 우리 부락을 침략하려고 잠복해 있었어. 그 정보를 우리 아버지하고 두 분이 동문 쪽에서 보초를 서다가 (지서에) 연락을 했어. 그러니까 군인들이 출동한 거야. 그런데 거기서 폭도들이 딱 잠복했다가 그냥 막 쏴버리니까 군인들이 한 이십 명 죽게 됐어.”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군경이 희생됐던 사건은 결국 동쪽 작은 마을에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함덕에 있던 소대장이 화가 난거야. 부하들이 다 죽었으니. 그래서 바로 뒷날 북촌에 총소리가 막 쾅쾅 나니까 무슨 일인가 봤더니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거야. 우리 동복은 안올 줄 알았거든? 그런데 한 5시 쯤 되니까 동복 넘어와서 다 모이라 해가지고, 남자 여자 구분해서 남자만 다섯명 씩 세워놓고 다 죽였어. 한 2,3일 사이에 돌아가신 분이 90명 정도야. 아군들이 와서 그렇게 한 거야. 우린 억울한 거지. 나는 어릴 때니까 어머니, 할머니 품 속에 있는데 다 봤지. 군인들이 남자들 앞으로 가라고 해서 총으로 그냥 막 뒤에서 쏴 버렸어”

김대규 씨의 누이도 “우리 아버지는 수건을 머리에 이렇게 써가지고 여자들 틈에 숨어서 살았어. 나중에 말 들어보니까 대장이 다 총 쏘아서 죽인 다음에 동복리 한 사람이 ‘나도 전날 연락 갔다왔습니다’하고 손 든 사람이 있어가지고, 어디 연락갔다 왔다 하면 살아질까봐...”라고 그 날 사건을 증언했다.

“3분의 1은 살았어. 사람이 살아 있었다고. 그런데 한 사람이 ‘나도 연락 갔다왔습니다’ 그래서 칼과 대창으로 무자비하게... 그래서 다 죽어버린 거야.”

‘살아날 수도 있었는데...’ 결국 그 사건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들에 대한 사무침이 자식들에겐 깊게 남아 있었다.

이날 제사집에는 김용택 씨의 동생인 김영자 씨도 함께 와 있었다.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식게음식을 먹고 있는 가족들.

“우리 아버지는 외국 다니는 배, 그런 배 타타가 조금 몸이 아프니까 잠깐 휴양하러 왔다가 죽어버렸어. 그래서 우리는 보리밥도 못 먹어서 굶어서 살았어. 아버지 돌아가시니까...”

일손을 보태러 와 있던 손녀도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할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셨었는데 배 타고 잘 사셨더라고요. 할아버지가 살아있었으면 우리도 잘 살았었을 텐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남은 할머니와 자녀들이 힘들었죠. 자손들이 제대로 된 교육까지는 아니더라도 밥이라도 제 때 먹고 살았을 텐데...”

힘든 삶을 이어온 가족들의 아픔은 이렇듯 대를 이어서도 전해져 있었다.

이전 기억에 눈물을 보이던 김용택 씨는 한참이 지나 다시 말을 꺼냈다.

“그 때 내 인생은 무너진거야. 아버지 없으니 어떡할 거야. 고생 말도 못해. 나는 일본으로, 군산으로 다니느라 고향을 못 살아봤다고.”

그 사건이 있던 이후로 김용택 씨는 제주를 떠나 군산으로, 일본으로 가서 20여년 간을 지내야 했다.

“4,3 희생자라서 옛날엔 연좌제 때문에 그 어디도 취직을 못해. 나는 15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도 못 들어갔어. 맨날 밤에 맞으면서 보초를 선단 말이야. 옛날엔 부락에 돌로 성을 쌓았다고. 밤에 폭도 들어오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 그 성에서 보초를 서야 하는 거야. 깡통에 줄 매달아서 왔다 하면 울리고... 그 나이에 무슨 보초를 서느냔 말이야. 그래서 내가 16살 때 군산을 갔어. 마침 군산에서 이모가 피난을 왔는데 한심한 거지. 그래서 이모와 함께 군산으로 간 거야. 공장 생활 하면서 거기서 한 5년 근무했지. 그러다 군대 갔다와서 제대하고 부산에서 회사 다니다가 일본에 밀항했지. 저 사람하고 결혼한 지 3년 만에...”

결혼한 지 3년, 어린 아들이 세 살이던 그 해 30살 청년 김용택씨는 고향을 등져야 했다. 먼 타지 일본 땅에서 18년 동안 ‘나는 몰라도 내 아들만큼은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목숨 걸고 일을 했다. 그리고 1988년 올림픽 이후 자수해서 왔을 때, 세 살이던 아들은 어느덧 21살 건장한 청년이 돼 있었다.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김용택 씨가 마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 사람하고 떨어져 산 덕에 자식이 하나 밖에 없지. 나는 그런 생활을 했어. 그래도 아들은 지금 사무관이 됐고, 손자도 세 명이나 있고, 나도 좀 그래 성공한 거야.”

4.3을 온 몸으로, 전 생애 동안 겪어야 했던 김용택 씨는 그래도 자신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죄 어시 죽었지게 죄 어시’ 라고 억울함을 토로하면서도, 결국 남은 인생을 풍파 속에 살아남아야 했으면서도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요새 사는 건 진짜 대통령도 안 부러워.”

아버지 없이 고단한 삶, 낮엔 군경이 무섭고 밤엔 산사람이 무서워 잠도 못 이루던 그날에 비해서는 그 어떤 삶도 행복할 것이다. 죽음의 위협 없이 삼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 어떤 행복에 비할까. 결국 동복리 마을 사람들은 그 ‘행복’을 품고 오늘 하루도 살아내고 있었다.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음식을 나눠먹고 있는 주민들.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식게상.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술잔을 올리고 있는 김용택 씨.

▲ [제주도민일보=고민희 기자] 김용택 씨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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