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집단·대량학살이 빚어낸 역사적 비극 현장 찾아나서
제사를 통해 미래세대에 전해지는 제주 4.3을 집중조명
제주 4.3 흔들기 세력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

▲제주 4.3 당시 학살터의 하나인 너븐숭이의 속칭 '대코할망밧'. 현기영씨 소설속에서 옴팡진 밭이라 하여 '옴팡밭'으로 나오는데, 현재 이곳에는 순이삼촌 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탐라사진가협의회 김기삼 

[제주도민일보=김명선 기자] 최근 행정자치부가 보수단체에서 제기한 4.3희생자 53명에 대한 사실조사를 제주특별자치도에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황교안 국무총리가 제주출신 김우남 국회의원에 보낸 서면질의 대한 답변에서 "4.3희생자 중 한, 두명이라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헌법의 기본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한 인물이 있다면 심의를 통해 희생자에서 제외하는 것이 대다수 4.3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답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총선 정국을 앞두고 자칫 이념대립 양상으로 발전할 우려까지 낳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제주도민일보>는 제주 4.3의 대표적인 제노사이드(genocide) 현장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북촌리와 동복리를 다녀왔다.

본사에 이번 기획은 제주 4.3의 아픈 역사가 현재시점까지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제주 4.3을 학교 현장에서부터 배우는 우리 미래세대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북촌리와 동복리에는 매년 음력 12월 18일이면 '가메기 모른 식게'가 열린다. 제주 4.3 당시 북촌리와 동복리는 한날 한시 각각 300여명, 80여명의 마을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북촌리와 동복리 마을 중간에서 군인이 무장대에 사살됐다는 이유로 북촌리는 3일 어간에 걸쳐 400명이 넘는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동복리 또한 이 사건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칼의 희생양이 됐다.

희생자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어린아이, 여성, 노인 등도 포함됐다. 왜 죽어야 했는지, 죽어가는 이들은 알지 못했다.

1978년 북촌리의 너븐숭이에 있는 애기무덤(당시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묘),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제주 4.3이라는 말조차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1~2년에 걸쳐 고향에 돌아온 '살아남은 자'들은 참혹하게 죽어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남편과 아내를, 형제들을 모시고, 가슴에 묻은 자식을 그리며 제사를 지내도 귀신도 모르게 지내야만 했다.

제주에서는 이를 두고 '가메기 모른 식게'한다고 불렀다.

낮에는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이, 밤에는 산사람이 총과 죽창을 들고 서슬 퍼런 눈으로 '살아남은 자'를 옥죄어 오던 혼돈의 그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어찌할 수 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꼭꼭 숨어야만 했다.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고 말하지도 말아야 했다.

그래도 항상 삶의 끝자락에 놓여 있던 '살아남은 자'들에게 '가메기 모른 식게'는 카니발(carnival)적인 요소가 강했다.

한날한시에 치르는 식게를 위해 마을 주민 전체가 모여 돼지를 추렴하고, 서로의 식게집을 방문해 위로 끝에 반을 나누면서 자신들이 짊어져야만 했던 고단한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를 통해 현재의 이념을 뛰어넘은 상생을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본보는 이번 기획에서 앞서 지난 2011년 제주 4.3 63주년을 추념하기 위해 발간된 사진집 (사)탐라사진가협의회의 '가메기 모른 식게'를 모티브로 해 취재에 들어갔다.

지난달 27일 동복리 마을에서 '가메기 모른 식게'가 행해지는 4곳의 가정을 방문, 본보 기자들이 직접 현장에서 취재를 실시했다.

프롤로그에는 2011년 당시 발간된 '가메기 모른 식게'의 마을과 관련 이야기를 그대로 실어 '가메기 모른 식게'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이해를 돕고자 한다. 서문의 일부분도 인용했다.

이어 4회 걸쳐 본보가 주목한 '가메기 모른 식게'가 제주 4.3이라는 역사적 비극이 낳은 하나의 문화로 간주하고 이 문화가 후세에 어떻게 전승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특히 제주4.3을 흔드는 세력에게 당사자들이 겪은 아픔 등이 세대에 걸쳐 전해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더 이상의 4.3 흔들기는 후세에 의해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보내고자 한다.

다음은 사진집 '가메기 모른 식게'에 나오는 북촌리와 동복리 마을 소개.

▲제주 4.3당시 북촌리 대학살이 벌어진 여러 현장 중 가장 많은 인명 살상이 이루어진 당밭. 사진=탐라사진가협의회 강정효 

북촌마을


제주시 북촌마을은 동쪽으로는 구좌읍 동복리, 서쪽으로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조천읍 함덕리 사이에 있는 해안마을이다. 제주4.3의 전 과정에 있어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부른,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학살의 현장이다. 4.3이 지난 후 오죽했으면 '무남촌(無男村) 북촌'이라 하여 남자 어른이 없는 마을이라는 호칭까지 나올 정도였다.

북촌리에서의 학살극은 1949년 1월 17일에 자행됐다. 이날 아침에 구좌읍 세화리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리로 이동하는 도중 북촌마을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2명이 숨지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군인이 사망하자 당황한 마을 원로들이 시신을 들것에 담아 대대본부를 찾아갔는데 흥분한 군인들이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주민들을 사살해 버린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장교의 인솔 아래 2개 소대 가량의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북촌리를 포위, 마을주민 전체를 학교운동장으로 내몰고는 온 마을을 불태워버린다. 이어 민보단 책임자를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즉결처분한 후 군경가족을 제외한 주민 대부분을 '당팟'과 '너븐숭이' 등 학교 인근 밭으로 끌고가 무차별 사살했던 것이다.

학살극은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됐는데 이때 희생된 주민들이 3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대장은 주민들에게 다음날 함덕으로 오도록 명령하고는 철수했다. 다음날 일부의 주민은 산으로 피신하고, 나머지는 함덕으로 찾아갔는데 주민들 중 또다시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된다. 이때 희생된 400여명의 주민들 중에는 수십명의 어린이까지 끼어 있었는데 이들의 시신을 인근에 임시로 가매장한 것이 '너븐숭이 애기무덤'이다.

북촌리에는 이보다 앞서 1948년 12월 16일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주민 24명이 이유도 모른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 동복리 지경 낸시빌레에서 집단총살당하기도 했다.

북촌리는 속칭 '아이고 사건'으로 또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1954년 1월 23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몰장병 고별식에서 비롯됐다. 행사 도중 한 주민의 제안에 따라 4.3희생 영혼을 위로하는 묵념을 하게 되는데 설움이 복받친 주민들이 대성통곡을 했고 이러한 내용이 경찰에 알려지면서 줄줄이 붙잡혀가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북촌의 참상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북촌포구에 있는 도대불 등명대가 있는데 4.3 당시 군인들이 폭도마을이라며 마을 곳곳에서 총질을 하는 과정에서 총탄에 맞아 부서진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이때 마을에 있던 아름드리 팽나무는 총탄의 영향으로 고사하기까지 했다.

북촌리의 비극은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으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동복리의 학살터인 굴왓. 사진=탐라사진가협의회 정이근 

동복마을

동복리는 구좌읍의 서쪽 끝에 위치한 해변마을로 동쪽으로는 김녕리, 서쪽으로는 조천읍 북촌리와 접해 있다.

구좌읍과 조천읍의 경계마을로 '골막'이라 불리기도 한다. 국도와 해안변이 인접하여 해안경관이 뛰어나고 해산물이 풍부해 현재 관광체험어장으로 유명한 마을이기도 하다.

동복리는 조선 정조 때 제주 일원에 5년간 흉년이 들어 부황증에 걸려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하자 전 재산을 내놓아 곡식을 사들이고 관덕정 앞뜰과 삼성혈 목에 가마솥 10여개씩을 걸어 놓고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한 그릇씩 나눠주며 사람들을 살려냈던 김만덕의 고향마을로 유명하다.

김만덕은 골막(동복리)에서 김응열의 2남1녀 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현재 250세대 6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조용한 마을인 동복리도 4.3의 광풍은 비껴가지 않았다.

동복리에서의 4.3 인명피해는 1948년 마을 안 비석거리에서 남편 또는 아들이 산으로 도피했다는 이유로 9명이 희생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희쟁자 중에는 5세, 6세, 8세, 12세의 어린이는 물론 76세의 할머니도 끼어 있었다.

이어 1949년 1월 5일 갈옷 차람으로 민가에 찾아온 토벌대를 숨겨주려던 강봉옥, 백화일 부부 등이 군인들에게 희생됐다. 이른바 '함정토벌'에 걸려든 것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마을인 북촌리에서 학살극이 자행된 1949년 1월 17일, 이 마을 주민 86명이 군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된다. 북촌리에서 학살극을 벌이고 부대로 복귀하던 군인들이 동복리에 들러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연설을 들으라며 '장복밧'에 모이게 한 후 주민들을 끌고 인근 '굴왓'으로 끌고 가 18세 이상의 남자들을 따로 분류해 이들을 학살한 것이다.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M-1소총으로 난사한 후 대검으로 확인 사살까지 했다.

이때 마을의 모든 가옥도 불태워져 주민들은 김녕으로 이주해 1년 가까이 소개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김녕공회당 앞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은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들에게 온갖 수난을 당하는 한편, 이들 중 30여명은 1949년 1월 20일 도피자가족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군인들에게 총살당하기도 했다.

지금 동복리의 마을 동쪽 끝 도로변에는 해풍의 영향으로 남쪽으로 휘어진 팽나무 한 그루가 그날의 참상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다. 처음 주민들이 집결했던 장복밧과 나란히 위치한 곳이다. 이 팽나무가 휘어진 가지는 마치 그날의 참상을 잊지 말라는 듯 학살이 자행됐던 굴왓으로 향하고 있다.  

▲동복리 제주 4.3 희쟁사 위령탑. 사진=탐라사진가협의회 강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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