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터뷰] 까막눈 설움 벗는 늦깎이 학생들…②
김만자씨 “이젠 비 안와도 학교에 가…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

[제주도민일보=안서연 기자] “할머니, 어젯밤엔 잘 잤어요? 허리는 좀 괜찮고?”

행여 찬바람이 따라 들어올세라 부랴부랴 문을 닫고 방 안에 들어선다. 익숙한 몸짓으로 외투와 머플러, 가방을 벗어 구석에 놓은 뒤 박필순(가명·91) 할머니에게 간 밤의 안부를 건넨다.

박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소매를 걷어올리고 옆에 놓인 빈그릇을 치우기 시작한다. 설거지를 마친 뒤에는 반찬도 좀 만들었다. 이제 할머니 목욕도 시켜드릴 참이다. 보일러를 틀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일찍 잠든 박 할머니의 베개를 고쳐드리고 나갈 채비를 한다. 추적추적 겨울비 내리는 소리가 귓가를 찌른다. 이대로 집에 가서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 고된 몸을 눕히고 싶다.

‘오늘은 학교에 가지 말까?’ 꾀가 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 동려평생학교 고등반에 재학중인 김만자(65)씨.

늦깍이 고등학생 김만자(65)씨.

어렸을 땐 비오는 날이 참 좋았다. 밭에 안 나가고 학교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은 학교에 가고, 날 좋은 날은 밭에 가서 소 밥 먹이고 그랬지. 아무리 기다려도 왜 그렇게 안왔나 몰라 비가….”

제주시 노형동에서 3남4녀 중 다섯 째로 태어나 단 한 번도 부모님의 뜻을 거스른 적 없이 살았다. ‘일을 하라’면 하고 ‘애를 보라’면 봤다. 학교에 간 날이 1년에 30여일도 채 안된다. 겨우겨우 국민학교(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우리 시대가 그렇게 힘든 시대는 아니었는데 말야. 난 부모 말에 거역도 못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던 것 같아”

‘사람은 그저 성실하면 된다’는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살림을 꾸려나가기는 힘이 부쳤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어린 아들 둘만 남기고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때가 33살이었다. 큰 아이는 10살, 작은 아이는 8살이었다.

재혼은 바라지도 않았다. 친정아버지는 ‘북도 등에 멘 사람이 치는거지 남이 와서 네 북을 쳐주진 않는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시댁에선 어린 손자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북을 두드려야만 했다.

“남편이 떠날 때도 슬펐지만 사춘기 아들이 말을 안 들을 때 더 슬펐어. 아빠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엄마 역할에 아빠 역할까지 더 하려니 힘이 들었다. 어느 역할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없는 살림에 먹이고 입히려니 ‘돈 버는 기계’로만 살았다. 공사장에서 시멘트 만드는 일도 하고, 등짐도 져서 날라봤다. 애들을 재우고는 세차장에 나가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았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나이를 먹었더라고”

큰 아들이 장가갈 때야 비로소 나이를 헤아려봤다. 어느새 50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이제는 북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더라고”

그러던 어느 날 먼 친척언니를 우연히 버스에서 만났다. ‘어디에 가냐’고 물으니 ‘동려평생학교에 간다’고 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공부를 가르쳐주는 곳이라고 했다.

불현듯 글을 몰라 서러웠던 기억이 울컥 떠올랐다. 어쩌다보니 외국 여행을 할 기회가 생겨 생애 처음으로 ‘여권’이란 걸 만들러 간 날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영어로 척척 자기 이름을 써내는데 난 한글도 제대로 못쓰니까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창피하더라고”

그 때의 서러움을 안고 평생학교로 향했다. 63살.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이 부끄러워 자식들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노인돌보미 일이 끝나면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갔다.

“밤이 되도 집에 안들어오니까 어딜 그렇게 다니는 거냐고 아들녀석이 물어보더라고. 그제서야 쭈뼛쭈뼛 털어놓았지.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갈 걸 그랬다고 말야”

어머니의 뒤늦은 공부 소식에 아들은 부끄러워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교재를 사주겠다’고 힘을 실어줬다.

“살기가 힘들어서 자식을 날 때도 기쁘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 선생님하고 공부하며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더라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물어봐도 선생님들은 싫은 내색이 없다. 오면 ‘왔느냐’, 늦는 날엔 ‘무슨 일 있느냐’고 말해준다. 학교가 이런 곳이구나 싶었다. 지난 삶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유난히 고된 날에는 ‘에이 오늘 하루는 빠질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막상 학교에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김수영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글을 배우고 난 뒤 주위에서 이상하게 나이 먹을수록 밝아진다는 소리를 하더라고. 내 스스로도 내가 당당해지는 걸 느껴”

어릴 적 집 안에는 ‘하면 된다’는 가훈이 떡하니 걸려있었다. 하지만 살다보니 해도 안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자식들에게도 늘상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 가훈을 믿지 못했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고부터 그 말을 믿게 됐다.

진도도 제대로 못 따라갈 줄 알았는데 어느새 중등반에서 고등반으로 넘어왔다. 여전히 영어는 한 자도 모르지만, 적어도 한글은 읽고 쓸 줄 안다. 간판을 읽는 일도 식은 죽 먹기다.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책 읽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 얼마 전에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읽었는데 내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도 말야, 울어도 봤고, 웃어도 봤고, 땅을 쳐보기도 했거든”

흐린 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강인하고 질기게 지금까지 버텨왔다. 이제와 꾸는 꿈이 하나 있다면 단 한 번도 털어놔 본 적 없는 마음을 기록하는 것이다.

“늦게 배운 글씨로 힘들었던 지난 삶을 기록해서 내 자식들에게라도 나의 삶을 들려주고 싶어. 수필을 써보고 싶은데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네”

▲ 지난해 12월20일 진행된 동려평생학교 졸업식 모습.

지난해 한 방송국에서 찍어간 평생학교 졸업식 장면을 본 며느리는 ‘어머니 참 잘 나왔던데 왜 졸업식이라고 말도 안했느냐’고 서운해했다. 꽃다발이라도 들고 갔을 것이라며 말이다. 참 살가웠다. 

“자식한테 물려준 게 없으니 짐은 되지 말아야지. 며느리는 나처럼 살면 안되잖아”

아빠 없이 키운 미안함에 쉬는 날이면 대신 손주를 봐주기도 한다.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말이다. 평일엔 일하고 공부하고 주말엔 손주를 보는 요즘이 너무 행복하다.

얼마 전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에게서 ‘TV에 나온 사람이 너 맞느냐’며 연락이 왔다. 방송을 본 친구도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말했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할 때라고 말이야”

공부를 마치고 늦은 밤이 되서야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눕는다. 내일은 또 뭘 배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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