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터뷰] 까막눈 설움 벗는 늦깎이 학생들…①
김순여씨 “못 배운 한 물려주기 싫어 악착같이 일해…이젠 내 차례”

학교에 간다

나는 학교에 올 때마다 행복하다
공부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글을 알게 될수록 더 행복하다
이 행복이 계속 댔으면 좋겠다

[제주도민일보=안서연 기자] 1985년 어느 겨울 새벽녘, 탕! 탕! 소리가 간밤의 정적을 깨운다. 공사현장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흰 목장갑을 낀 한 여인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남자들도 옮기기 힘든 철근을 어깨에 메고 옮기고 있다.

밤일을 하고 잠깐 눈만 붙이고 나와서 그런지 졸음이 몰려온다. 하지만 자칫 정신을 놓았다간 다치기 십상이다. 절대로, 다쳐선 안 된다. 그에게는 자신만 바라보는 자식이 무려 7명이나 된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파도 아프지 않다.

그의 나이 50살.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안 해본 일이 없다. 번듯하게 취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내밀 학벌이 전혀 없었다. 그 흔한 초등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배운 게 없으니 그저 몸으로 때울 수밖에. 그래서 공사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나마 공사장 일이 가장 보수가 높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시멘트에 자갈을 버무려 콘크리트 만드는 일을 했다. 하지만 레미콘이 일자리를 뺏어버렸다. 그렇다고 일을 놓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택한 일인 남자들과 함께 철근을 옮기는 일이다. 그렇게 꼬박 25년을 살았다.

▲ 동려평생학교 초등반에 재학중인 김순여씨.
늦깎이 초등학생 김순여(80).

제주시 광양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친구들은 부모님 손을 잡고 학교에 갔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가 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학교에 가자’고 말해주지 않았어”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동네가 텅 비어있을 때,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집안에서, 밭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먼저 학교에 다니던 언니도 국민학교를 채 마치지 못했다. 집에서는 동생에게도 일을 하라고 채근했다. 하지만 동생마저도 언니들과 똑같은 길을 걷게 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 매를 맞으면서라도 학교에 다녀야 해!’하고 다그쳤지”

우여곡절 끝에 동생은 중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어느덧 나이가 차고 시집을 가게 됐다.

“시집오기까지 바라던 삶은 그저 ‘평범하게 살기’였는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참 어렵더라고”

‘못 배운 한(恨)’은 자식들에게는 더더욱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밤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돈 달라’는 아이들의 말이 가장 무서웠다.

“다른 부모도 다 그렇겠지만 우리 아이들도 배움에 있어서는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었어. 나처럼 살면 안되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내 아이들은 배우게 하고 싶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어깨가 내려앉을 정도로 악착같이 철근을 날랐다.

건강 악화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때에 이르러서야 일손을 놨다.

“아이들도 이제 모두 어엿한 성인이 됐고, 옛날 같으면 고려장을 해야 할 나이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겠구나 싶더라”

▲ 김순여씨가 쓴 시 '학교에 간다'.
75살.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동네에 있는 ‘동려평생학교’였다. 글을 알려주는 곳이라고 진즉에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갈 엄두도 못 낸 채 머뭇거리기만 했다.

어느덧 팔순을 앞둔 시점에야 용기를 냈다. 드디어 배움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처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칠판을 쳐다보니 그제야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너무도 감격스럽게 느껴졌다.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으며 글자를 익히는 학생이 됐다.

드디어 ‘김·순·여’ 이름 세 자를 제대로 쓰게 됐다.

“어디 가서 뭐만 쓰라고 하면 벌벌 떨었지. 그래서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기 일쑤였다니깐”

글을 배운 뒤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글을 쓸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지고 속으로는 웃음이 절로 났지. 하지만 나이가 먹어 머리가 안돌아가서 3년을 배워도 글을 깨우기 힘들어”

나이 탓을 하지만 엄살이다. 지난해에는 시를 써서 평생학교 시화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떠듬떠듬 책도 읽을 수 있게 됐다.

80년 만에 난생 처음으로 ‘편지’를 써서 부치기도 했다. 육지에 있는 막내딸에게 하는 안부 인사였다. 편지를 받은 딸은 어머니의 편지에 ‘감회가 깊다’며 답장을 보내왔다.

지난 고생들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몇 해 전에는 제주시로부터 ‘장한 어버이상’도 받았다. 물론 감격스러웠지만 그것은 그저 ‘어머니’인 나에 불과했다.

“상 받을 때보다 공부를 하는 요즘이 더 행복해”

배움을 통해 비로소 ‘나’를 찾고 있는 김순여씨는 오늘도 학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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