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산은 험하고 바다는 사나웠다’고 여겼다. 그래서 진상(進上)이나 공마(貢馬)를 위해 바닷길로 나서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열중 대여섯을 표류하거나 드렁허리, 고래의 밥이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대양의 길목에 위치했지만 바다를 경영했던 장보고와 같은 해상영웅의 전설은 전해오지 않는다. 대신 바다 속 용궁 이야기만 간혹 전해지고 있다.

예전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로(漁撈)도 가족·마을 사람이 중심이 돼 이뤄졌다.

배를 매어두는 선창(船艙)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나와 만들고 보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곳에 있는 생수가 나는 ‘물통’도 관리했다.

그리고 안개 낀 날이나 어둠이 빨리 내리는 날이면 방향을 가리켜 줬던 ‘도대불’이라고 하는 등대(燈臺)도 쌓았다.

또 멜(멸치)을 후릴 때 사용했던 그물을 보관하는 ‘덕자리’도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다에서 작업하는 포작인(匏作人)들이 해상에서의 안전을 빌고 기원했던 ‘할망당’도 가꿨다.

지척의 바다를 어촌 사람들은 그냥 두지는 않았다.

사나운 바다였지만 오랜 경험으로 얻은 지혜를 모아 가까운 바다를 경영했다.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던 겨울을 지나 5월이 되면 자리(돔)를 잡았다. 이 자리는 제주만의 특산으로 길이가 8~12cm의 가느다란 갈색 빛을 뛰는 고기로다. 때를 지어 연안, 특히 작은 섬 주위에 산다. 예전부터 자리젖을 담아 반찬으로 이용했던 고기였다.

자리그물은 주위 4m, 길이 3m 정도의 크기로 눈은 가늘고 방추형으로 만들고 그 안에는 둥근 나무 테가 붙어 있다. 이것을 떼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 자리가 모이는 곳에 내린다. 한 마리가 그 그물 속에 들어가면 한 무리가 전부 들어가게 돼 잡을 수 있다. 8월이 지나면 자리도 물을 찾아 자리를 옮긴다고 한다.

낚시는 자리 어기가 시작될 때부터 10원말까지 주도 행해졌다. 떼배를 깊은 바다로 띄워 외줄에다 낚시를 달고 바다 깊숙이 떨어 뜨려 손으로 낚았다.

주로 갈치를 잡았는데, 경비가 들지 않아 널리 행해졌다. 가장 뛰어난 미끼는 자리였다. 이것을 마리 채 배에서 입으로 바늘을 꿰어서 쓰는 데, 자리 어기(漁期)가 끝나면 멸치로 대신했다.

주낙은 ‘삿내끼’라고도 했는데 전남에서 건너온 어로법이다. 한꺼번에 많은 낚시를 이용했다. 때문에 어획물이 매우 많은데 비해 경비는 별로 들지 않는 편이었다. 길이 50길(한길은 두 팔을 좌우로 벌린 길이, 약 1.8m)정도의 굵은 줄에 2~30개의 낚싯줄을 연결시켰다. 얇은 널판으로 만든 나무 바구니 속에 넣어 배 한척에 10개 정도를 싣고 바다로 나간다. 우선 미끼로 자리나 멜, 때로는 작게 자른 소라를 사용해 준비한다.

바다에 따라 조류(潮流)를 감안해 가며 주낙을 흘려준다. 이렇게 몇 시간을 흘려 뒀다가 한쪽에서부터 끌어올린다. 주낙으로 잡아 올린 고기는 주로 돔·북바리·민어 등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엔 흘려둔 주낙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흘려놓은 주낙을 그곳에서 맞붙어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밤을 새워 흘러 보내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어민들은 그물을 구입하는 비용이 상당히 들었기 때문에 1920년대 이후에는 어업조합에서 공동출자해 구입했다. 또 공동으로 작업하고 분배했다.

후릿그물은 멸치잡이에만 이용됐다. 바위가 적은 해변에서 멸치 떼를 발견했을 때, 배에 타서 바다로 나가 그물을 가라앉혀놓고 이것을 포위, 점차 해안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었다. 사용 후 그물은 해안의 바위 위에 널어서 말리는데, 이때 수리도 했다고 한다.

후릿그물이 섬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이다.

그물에 대한 지적도 얕다. 그물은 오사카에서 구입해온다. 그물은 해안에 만들어진 그물막(덕자리)이라고 불렸는데 네 발 달린 바닥 높은 통에 넣어서 보관했다.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의 포작인들이 통나무를 엮어 만든 ‘떼배’를 이용했기 때문에 거친 파도에는 바다에 나갈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바람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동풍을 샛바람, 남풍을 마파람, 서풍을 갈바람, 북풍을 하늬바람, 북동풍을 높새바람, 동남풍을 갈마바람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북풍(北風)과 동풍(東風)이 가장 심해 이 바람이 불 때에는 출어(出漁)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풍(東風)이 불어 구름이 동(東)으로 흐를 때에는 폭풍의 전조로서 연해에 출어하고 있는 떼배는 시급히 선창 안으로 피난했다. 또 동풍이 불고 뒤에 북풍이 불면 천기가 좋아진다는 징조로 배를 준비해서 출어를 기다리라고 했다.

한편 여름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고, 이것이 지나 장맛비인 ‘마’가 지면 이 때부터가 자리가 잡히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어로에 관한 금기사항도 많았다고 한다.

출어를 위해 선창으로 가는 길에 여자가 길을 가로지르면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해 매우 꺼렸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출어하는 길에 빈 물허벅을 진 여인을 보면 고기가 안 잡힌다고 여겼다.

게다가 출어하기 전에 다른 사람과 싸운다든지 사람을 죽인 꿈을 꾸면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여겼다. 다시 말해 꿈자리가 나쁘면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출어 중 거북을 보면 고기가 안 잡힌다고 여겼다. 거북이 그물 속에 걸려도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출어 중에는 ‘거북’이라는 말이 금구(禁句)이며 혹 거북을 말해야 할 때는 ‘용왕 셋째 딸’이라고 돌려 말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래도 또한 금구여서 혹 말해야할 때는 ‘영감’이라고 불러야 했다.

바다는 무진장의 자원(資源)을 품고 있는 자원의 보고(寶庫)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뛰어들지 못했던 곳이었다. 거지와 승려도 첩(妾)을 두고 사는 지역이었지만 바다에서 작업하는 포작인(匏作人)만은 장가도 들 수도 없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공물 진상(進上)이나 상선을 탔다가는 고래와 드렁허리의 밥이 되고 말 신세라고 보았기에 바다에서 어로 작업을 하는 행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옛 사람들은 어로가 이뤄지지 않는 곳으로, 그물을 쓰지 않는 곳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바다를 경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연안을 중심으로 낚시와 작은 그물을 이용해 갈치·자리·멸치를 잡는 정도 수준의 어로였다. 악착같은 마음으로 자식을 기르며 내일을 꿈꾸며 오늘을 살았던 우리 해녀들이 미역·소라·전복을 채취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대양의 길목에서 이어도까지 이어지는 우리 바다에는 무진장의 해저 자원이 한 치의 오염과 난개발도 없이 고스란히 우리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창조적 융합과 과학적 기술 발전을 해양 개발로 집중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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