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법’ 있어도 ‘경과규정’ 없어 적용 불가…입법부 ‘실수’
1심·2심 판단 달라…결국 가해자 3명 ‘햇볕’, 피해자는 다시 ‘그늘’

지난해 8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 장애여성들을 10여년간 성폭행한 이른바 ‘제주판 도가니’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이 분노로 들끓었다.

당시 피해자들 중에는 모녀까지 포함돼 있었으며, 가해 남성들에는 입주민대표와 장애인협회 간부까지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충격은 더했다.

범행 당시로부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지적장애인의 진술 능력의 한계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가해자 7명은 모두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현재, 피해여성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다. 가해자들을 심판할 ‘법’이 피해자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해자 7명 전원이 구속 기소됐지만, 8월 현재에는 단 3명만이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모두 혐의가 인정됐지만 법적 판단에 의해 이 중 4명이 풀려난 것이다.

지난해 4월부터 한 달간 지적장애3급 여성 A(30)씨를 3차례에 걸쳐 추행한 추모(66)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2002년 4월 술에 취해 아파트 놀이터에 있던 지적장애여성 B(당시 23)씨를 집으로 데려가 번갈아 성폭행을 한 고모(39)씨와 이모(39)씨, 김모(39)씨가 면소 판결로 석방됐다.

이들은 1심에서 혐의가 인정돼 각각 징역 10년, 8년, 7년을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에서는 처벌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 죄는 명백하지만 공소시효(10년)가 만료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1심과 2심의 판단이 이토록 달랐던 걸까? 이는 공소시효를 없앤 개정법률의 적용시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고씨 등 3명의 시효가 완료(2012년 4월)되기 5개월 전인 2011년 11월 개정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0조 제3항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사람을 강간한 경우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도가니법’이라고 불리는 이 개정법률은 2011년 광주 인화학교 사건에 여론이 들끓으면서 제정됐다. ‘고소기간이 만료됐다’는 이유로 가해자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것 등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법률을 언제부터 적용해야 할 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데 있다. 법 개정 이후 발생한 사건부터 적용할 것인지, 시효가 진행중인 사건에 있어서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이다.

통상 법 개정 시에는 ‘경과규정’이라고 해서 해당 법률을 언제부터 적용한다는 시점을 정한 부칙이 함께 만들어진다. 하지만 입법부가 ‘도가니법’ 제정 당시 이를 간과하면서 법을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됐다.

‘법 시행 전 행해진 범죄로 아직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적용한다’는 경과규정은 2012년 12월에야 만들어졌으며, 이는 6개월 뒤인 2013년 6월부터야 시행됐다.

이에 제주지법 제2형사부는 “법 개정 당시 경과규정이 누락된 것으로 보고 재판부가 판단하겠다”면서 “취약여성을 성폭행한 해당 사건은 공익적으로도 처벌의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공소시효 폐지 개정안을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법령의 시행 이전에 사건이 시작돼 이미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도 효력을 미치는 ‘부진정 소급효’를 적용해 경과규정이 없는 경우에도 죄를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경과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광주고법 제주부는 “입법상 단순 착오·누락이라고 봄이 상당하다”며 입법부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경과규정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피고인에게 불리하지 않은 종전의 규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며 공소시효 완료를 인정해 면소 판결을 내렸다.

경과규정 누락이 입법자의 과실에 따른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형사법상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추해석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므로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적용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혐의는 명백하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가해자 3명이 석방되자 제주지역 시민단체 등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흐른 지난 달 28일, 가해자 7명 중 혐의가 가장 많았던 입주자대표 박모(54)씨의 1심 재판이 진행됐다. 박씨는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무려 4명의 지적장애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런데 박씨 역시 2006년 5월 C씨(33)을 상대로 한 범행에 대해서는 공소제기일(2014년 2월) 전에 이미 공소시효(7년)가 완성됐으므로 면소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씨의 공소시효가 만료된 것은 2013년 5월. 이는 공소시효 적용배제 확대 규정(부진정 소급효 인정) 시행일인 2013년 6월보다 한 달 앞선 날짜로, 경과규정 적용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공소시효를 배제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법 개정 당시 경과규정을 두지 않은 것은 입법상 단순 착오·누락”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속칭 ‘도가니법’의 입법 경위, 당시 입법에 관한 사회적 합의·파장 등에 반하는 점 등에 비춰보면 성폭행 상태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불과 며칠 전 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면소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1심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박씨가 항소할 경우 2심 재판부가 이 부분에 대한 공소시효 완료를 인정한다면 박씨의 형량이 줄어들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에 제주지역 장애인 성폭력피해 지원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는 “장애특성을 간과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의 범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의 적용 범위에 대한 논점만으로 내려진 판결은 납득할 수 없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2011년 도가니법의 공소시효 배제를 적용한 1심 법원과 2012년 마련된 경과규정에 의해 공소시효 범위를 적용한 2심 법원의 법 해석의 차이는 여성장애인 성폭력 사건의 판결에 부정적 선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비대위는 또 가해자들이 사회로 나오면서 2차 피해가 양산되지 않을지에 대한 우려도 표했다.

이들은 “이번에 석방된 3명의 가해자가 마치 자신들이 무죄인양 행동하지는 않을까 염려된다”면서 “피해자 보호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가해자들이 자신이 살던 마을로 돌아갔을 때 피해자는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실제로 보복범죄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를 놓고 비대위는 “보호받아야 할 법으로부터 외면 당한 피해자는 허허벌판으로 내몰렸다”고 호소했다.

제주여성장애인상담소 김경미 소장은 “석방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피해자에게 ‘그들이 집에 갔다’고 얘기했더니 대뜸 ‘무섭다’고 말하더라”며 “지적장애로 인해 암기가 어려운 피해자가 오죽하면 112 번호를 외우고 있더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의 이후 행동에 대해 “1인 시위도 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싶지만 우리의 행동이 가해자를 압박할까봐 그저 논평을 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면서 “이대로 묻혀지는 건 불편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피해자를 챙기는 것이 먼저”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비대위는 피해자의 동네 복지관을 중심으로 청년회, 부녀회 등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다.

항소심 판결에 불복한 광주고검은 지난 달 22일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과연 대법원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입법부는 경과규정을 두지 않은 것이 그저 단순 누락 또는 착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실수’ 하나가 가해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피해자들을 ‘궁지’로 내몰았다.

장애인 성폭력 범죄를 일벌백계로 다스리기 위해 마련된 ‘도가니법’. 하지만 이번 사건에 있어서는 ‘경과규정 부재’에 가로막혀 법의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하는 꼴이 됐다.

‘도가니법’ 제정이 그저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하나의 ‘액션’에 불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개정 취지에 입각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 제주도민일보 안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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