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옛날 정의현(旌義縣)에 고씨 형방이 살고 있었다.

형방(刑房)이라고 하면 법을 집행하는 자리였으므로 인정에 치우치기 보다는 냉정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남달리 성품이 어질고 인자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는 양민이나 관군(官軍)이라 하더라도 마음 놓고 산길을 오갈 수 없을 정도로 도적떼들이 온 섬 안에 득실거리고 있을 때였다.

정의 관군들은 영문(營門 : 목사의 근무처)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면 산길을 다녀야 했다. 그 고을의 양민들은 춘궁기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 한라산 넘어 먼 마을까지 가서 쌀을 빚져다 먹어야만 했던 때였다.

이럴 때 마다 산길을 다녀야 했는데 가장 큰 골치거리는 도적떼들이었다. 도적떼들은 산길 가까이에 있는 굴에 살면서 오고 가는 양민들이나 관군들까지 잡아다가 쌀과 돈을 털어먹어 버릴 뿐만 아니라 저항했을 때에는 잡아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 제주 섬에 온통 흉년(凶年)이 들고 말았다.

도적떼들은 더욱 득실거렸다. 먹고 살기 위해 도적이 된 사람이 넘쳐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의현에서는 이만저만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여러 관원들이 모여 앉아 대책을 숙의했다. 대부분의 의견은 관군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가서 도적떼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일은 진행돼 나갔다. 관군들이 한 소굴을 찾아 습격하고 보니 도적들이 30여명이나 모여 있었다. 모조리 결박해 하옥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이면 모조리 살해할 날이다. 바로 그날 밤이 됐다.

삼경(三更)부터 고 형방이 옥문을 감시할 시간이 됐다. 고 형방은 아무리 도적들이지만 목숨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슬그머니 옥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적들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모두 고 형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 형방은 그들에게 자신을 묶어 두고 도망치라는 것이었다.도둑들은 고 형방의 입을 솜으로 틀어막고 손목을 기둥에다 묶은 다음 무사히 옥문을 빠져 나갔다.

새날이 밝았다. 모든 아전들이 원님 앞으로 모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고 형방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현감의 호통이 터졌다. 여러 아전과 관군들은 옥으로 달려갔다. 도적들은 고 형방을 묶어두고 모두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몇 년이 흘렀다.

정의 고을에서는 제주 목에 급한 장계(狀啓)를 가지고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모두들 꺼려하는 눈치였다. 도적떼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때 불쑥 나타난 것은 고 형방이었다. 고 형방은 산길을 따라 제주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느 덧 깊은 산길에 접어들어 설 즈음이 됐다. 부대오름(峰) 옆을 지날 무렵에 불쑥 한 무리 도적떼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 형방은 도적떼들에게 붙들려 굴로 들어가고 있었다. 굴 입구에는 초병(哨兵)인 듯한 도둑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굴 안으로 막 들어섰는데 도적 두목인 듯한 인물이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두목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지기 시작했다. 슬며시 고 형방 앞으로 나오더니 손목을 잡고 상석(上席)으로 모셔 큰절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여러 가지 음식은 물론 주안상(酒案床)까지 풍성히 차려 대접하기 시작했다. 바로 생명의 은인에 대한 극진한 대접이었다.

고 형방은 하룻밤을 도적들과 그 소굴에서 같이 보냈다. 날이 밝자 두목은 여러 부하들에게 고 형방을 제주목까지 잘 모셔 다녀오라고 지시했다. 다른 도적떼들에게 붙들려 봉변을 당할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어진 고 형방은 도적들로부터 호위를 받으며 제주목에 도착해 소임을 다할 수 있었다. 돌아올 때도 도적떼들로부터 호위를 받았다. 두목은 산길까지 마중 나와 어진 고 형방을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굴속으로 모셔다가 다시 후하게 대접했다.

어진 고 형방이 정의 고을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두목은 고 형방에게 집에 가서 반찬이라도 하십사하고 자루 가득 쇠고기를 싸주었다.

하지만 고 형방은 굴 밖으로 한참 나와서는 두목으로부터 받은 소고기를 모두 내던져 버리고 말았다. 불쌍한 양민들로부터 도둑질해 온 것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아무리 죄가 많은 도둑이라도 모두 살려 보내 버린 고 형방만이 정의고을의 모든 장계를 제주목까지 가져가게 됐다. 그 고 형방을 두고 '어진 고 형방'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흉년(凶年)에 호구보다 더 긴요하고 급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형(刑)을 집행하는 나라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풍의 길목에 자리한 화산섬, 제주에서 기근(饑饉), 보리고개 등 배고픔의 아픔을 일상의 굴레로 경험했을 우리 선인들의 고통이 어진 고 형방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풍족함으로 넘쳐나는 이 시대이지만 내 주변에는 고 형방의 어짐으로 보살펴야 할 이웃은 없는지 되돌아볼 때다.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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