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대학로에서 만난 2인조 버스킹밴드 ‘후림(厚林)’
찌질하고도 솔직한 노래…"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우리들의 무대"

▲ 제주시청 부근 대학로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후림.
▲ 김범석씨(왼쪽)와 오치헌씨는 의경 부대에서 처음 만나 '음악'을 공통점으로 마음을 나누다 밴드를 꾸리기에 이르렀다.
늦은 밤 제주시청 대학로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귓가를 사로잡는다. 홀린 듯 끌려간 노랫소리의 끝에는 젊은 두 남자가 있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보컬과 기타를 치는 연주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들의 노랫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구경을 하는 행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길거리 모퉁이는 미니콘서트장이 됐다.

노래하는 김범석(22·노형동)씨와 기타 치는 오치헌(23·오라동)씨가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 주인공이다.

노래 한 곡이 끝나자 한 30대 남성이 이들에게 다가가 명함을 건넨다. ‘꼭 부탁드려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뜨는 남성. 알고 보니 다음 주에 있을 자신의 결혼식 축가를 부탁한 것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놓고 이내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이들 밴드의 이름은 ‘후림(厚林)’이다.

후림은 범석씨의 여자 친구 이름이기도 하다. 밴드 이름을 짓지 못해 고민하다가 제주의 느낌이 담긴 ‘두터운 숲’이라는 뜻에 꽂혀 밴드 이름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후림 없는 후림 밴드지만, 여자 친구 후림씨는 이따금씩 숫기 없는 이들의 매니저 노릇을 한다.

‘음악’을 사랑한 의경 동기들, 모두 육지로 떠나고 남은 건 둘 뿐

▲ (왼쪽부터) 김범석(22)씨, 김씨의 여자친구 후림(22)씨, 오치헌(23)씨.

범석씨와 치헌씨는 의무경찰로 근무를 하면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들은 부대 안에서 서로 음악을 즐기다 지난해 5월부터 본격적으로 길거리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경 동기 두어 명이 더 함께 했지만 타 지방 출신들이라 이내 곧 제주를 떠났다.

“예전에 함께 공연했던 부산출신 형이 있는데 멘트를 기가 막히게 해서 관객을 많이 끌어 모았거든요. 그런데 그 형이 부산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별 멘트 없이 노래만 해요. 저희가 둘 다 말솜씨가 별로거든요”

이토록 부끄럼 많은 이들은 ‘음악’을 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한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오롯이 음악에 취해 연주를 한다. 탑동 광장, 시청 대학로, 신제주 차 없는 거리, 서귀포 이중섭거리 등이 이들의 주 무대다.

연애 숙맥 오치헌씨의 자작곡…찌질 하고도 솔직한 가사

이들은 길거리 공연을 하다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존재를 알린 ‘버스커버스커’를 비롯해 공감 가는 가사말로 큰 인기를 얻은 ‘10cm’, 세대를 막론하고 마음을 울리는 ‘김광석’ 등의 노래를 주로 부른다.

“우선 사람들이 잘 아는 노래로 관심을 끈 다음 자작곡을 불러요. 내가 연애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노래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게 좋아요”

▲ 제주시청 부근 대학로에서 노래를 부르는 김범석(22)씨.
▲ 오치헌(23)씨가 기타를 치고 있다.
말만 들어선 연애에 능숙할 것 같은 오씨는 사실 연애 숙맥이다. 한 번 빠지면 마음을 다 줘버리는 ‘착한남자’인 치헌씨는 준수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꽤 오래 솔로였다.

치헌씨의 자작곡 ‘네게 사준 커피 값이 아까워’에는 커피만 마시고 홀연히 떠나버린 썸녀(썸씽녀·something+女)에 대한 배신감과 안타까움, 그리움이 담겨있다.

또 다른 곡은 ‘천사를 보았죠’다. 제목만 들어선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순애보 같은 마음이 담겨 있을 것 같지만 가사를 보면 찌질 하기 그지없다. 친구들과 고기 집에 갔다 만난 알바생이 너무 예뻐서 지은 곡이다. ‘상추 좀 더 달라’는 말에 친절하게 답해주는 그녀에게서 오씨는 ‘투명한 날개’를 보았다고 한다.

“당시 그 알바생을 보기 위해 한 달 동안 다섯 번 정도 고기를 먹으러 간 것 같아요. 지갑이 거덜 나 한동안 라면만 먹었어요”

씁쓸하게 대답하는 치헌씨의 말 속에서 ‘천사’와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의 자작곡이 재밌는 이유는 ‘찌질’해서다. 연애에 실패해 봤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솔직한 감정들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너희가 즐기지 못하면 나도 즐기지 못해”라는 일침에 쫄지 않아

▲ 후림 밴드는 "유명한 가수가 되기 보다는 제주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노래를 만들어 불러도 사람들의 호응을 많이 얻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길거리 공연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용기내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호응이 별로 없어서 풀이 죽는 일도 많았다.

지난해 여름, 삼양해수욕장에서 공연을 했을 당시의 일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쭈뼛쭈뼛 노래를 부르고 있던 중 한 30대 여성이 팔짱을 끼고 바라보다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너희가 즐기지 못하면 나도 즐기지 못해’라고 일침을 가한 뒤 ‘내가 버스커버스커를 좀 아는데 걔네도 별거 없어’라고 말하고는 휙 사라지더란다.

순간 범석씨는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정말로 그가 동경해 마지않는 버스커버스커와 친분이 있는 사이인줄은 잘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쫄지 마라’는 메시지를 던져준 것은 분명했다.

▲ 지난 벚꽃 축제에서 후림 밴드가 공연하는 모습. 커플들과 학생들 등 관객 여러명이 이들을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이후로 쫄지 않고 공연을 한 덕에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적도 있다. 한 기업체 행사에서 콘서트를 열어달라고 한 것이다. 제대로 장비가 돼 있는 곳에서 무려 10곡이나 부르고, 행사비까지 챙겼으니 여간 ‘쏠쏠’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달 열린 벚꽃축제에서 공연을 하던 중에는 한 40대 남성의 무리가 다가와 ‘엠프가 너무 작다’며 본인들이 쓰던 엠프를 주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 남성들의 불태웠던 열정을 물려받는다는 사실에 범석씨와 치헌씨는 들뜬 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공연할 곳이 없어요”…행정 차원의 장소·장비 대여 제안

▲ 김범석(22)씨는 '네가 즐기지 못하면 나도 즐기지 못한다'는 한 관객의 말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공연을 할 마땅한 장소와 장비가 마련되길 간절히 바라던 참이었다. 세대 간에 물려주는 것도 좋지만 이런 경우가 어디 흔하랴. 젊은이들의 문화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제주시 차원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길 바랐다.

범석씨는 “우리 말고도 공연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제주에는 우리의 ‘장기’를 뽐낼 공간이 없다.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면 상가 눈치를 봐야해서 마음 편히 공연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치헌씨도 “제주에도 학생들이 비용을 부담해서 공연을 할 수 있는 카페가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들만의 축제’로 그치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아는 사람들만 가고 그밖에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즐길 수 없다”고 지적했다.

범석씨의 여친 후림씨도 거들었다. “매주 금요일, 시청 벽화 앞에서 공연하고 싶은 사람들을 모집하면 어떻겠느냐”며 “엠프, 마이크 정도만 대여해주면 악기는 본인들이 갖고 오면 된다. A4사이즈의 홍보물로 곳곳에 홍보도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제주대 아라뮤즈홀이 시설이 좋긴 하지만 누가 그 산골까지 오겠느냐”며 “접근성이 좋은 공간에 문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주 떠나려는 젊은이들 붙잡아줘요”…음악의 온기로 발길을 붙잡는 ‘후림’ 밴드

▲ 오치헌(23)씨는 "연애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노래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게 좋다"고 말한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제주를 떠나려는 젊은이들을 붙잡아 달라”고 호소했다.

범석씨는 “함께 음악을 하던 형이 있는데 어느 날 ‘제주는 너무 지루해서 못 살겠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면서 “실제로 제주는 노래방, PC방, 당구장, 술집 이외에 젊은이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다”고 꼬집었다.

치헌씨는 “제주도는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생활 환경 조성에는 무딘 것 같다”면서 “당사자들의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도청 또는 시청에서도 조금이나마 신경써줬으면 좋겠다. 유지비용이 필요하다면 버스킹해서 번 일정 부분 돈을 지급할 용의도 있다”고 말했다.

제주에서 살고 싶은 젊은이들의 간절한 외침. 후림 밴드는 유명한 가수가 되기보다는 자신들의 고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계속 버스킹을 할 계획이에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의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 될 것 같아요” / 제주도민일보 안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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