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뉴시스

[진도=뉴시스] 세월호 침몰 7일째인 22일 오후 5시30분. 사고초기 300명에 육박하던 실종자 수는 이날 오후 들어서 200명 아래로 줄어들었다. 반면 사망자는 100명을 넘어섰다.

물살이 약해진다는 조금(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작은 때)이 되면서 민관군 합동구조팀의 수색작업은 속도를 냈다. 사고해역에서 벌어진 수색작업의 결과물은 곧바로 진도 팽목항에서 확인됐다.

실종자 가족들은 부두 가에 마련된 상황실 근처를 서성이다 수색결과를 발표하는 해경 관계자가 마이크를 잡으면 사망자 현황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현황판에서 시신의 인상착의를 확인하면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9.7t짜리 낚싯배 뉴원다호는 오후 6시, 일단의 기자들을 싣고 팽목항 인근 부두에서 출발해 침몰사고가 난 동(東) 거차도 남단 해상으로 출항했다.

섬의 내해를 벗어나자 10분도 안 돼 1m 남짓한 파도가 선수를 치며 배 양 옆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선실 밖으로 나가자 가만히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배는 요동쳤다.

원다호 선장 A씨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기자를 보고 "이틀 전에는 선내에서 나오지도 못할만큼 파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30년 가까이 배를 몰았다는 선장은 통영에서 배를 몰다 2010년부터 낚시꾼들을 무인도나 갯바위로 실어 날랐단다.

침몰 사고 이후 하루 2회 낚시꾼 대신 기자들을 사고해역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선장은 과적을 이번 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예상했다.

선장은 "내 배처럼 작은 배는 무게의 중심이 밑에 있어서 기울더라도 복원이 쉽다. 하지만 여객선의 경우 무게 중심이 위에 있어 기울면 일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일대 암초는 내가 샅샅이 알고 있다. 처음에 암초 때문에 좌초했다고 언론에서 나와서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 아들을 두고 있다는 그는 "모든 게 잘못 된 것 같다"면서도 "어쨌든 큰 배든 작은 배든 모두 선장에게(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선장과 얘기를 나눈 사이 배는 진도와 사고해역을 가로막는 상조도와 하조도 사이 좁은 해도를 가로질러 6시50분께 사고가 난 거차도 남단에 접근했다.

3600t짜리라는 크레인선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흰색 바탕에 붉은 줄무늬의 크레인 본체는 세월호 인양에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다. 크레인선을 지나자 평소 같으면 TV로나 볼 수 있는 수천t급 거함 수십 척이 바다에 위에 떠 있었다.

워낙에 선체가 커 설핏 바다에 빌딩을 세운 것처럼 보였다. 거함들 사이로 해경 쾌속정이나 특수부대 고무단정이 수시로 파도를 가르며 오고갔다.

하늘에서는 기종을 알 수 없는 군용기가 쉼 없이 오고갔다.

세월호 침몰 지점에는 중형 크레인이 설치된 바지선 1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민관군 잠수사들이 물에 들어가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어느새 수면에 가까워진 해는 마지막 빛을 발하는데 바지선 바로 위에 걸쳐있어 어찌 보면 수색작업을 비추는 조명 같기도 했다.

그 시각 이미 수면아래 20m 지점까지 가라앉은 세월호의 흔적은 다만 두 개의 부표로만 표시돼 있었다.

집채 만한 크기의 부표는 석양에 물들어 적갈색을 띠고 있었다. 외관은 무사귀환한 아폴로 착륙선을 연상시켰지만 이 부표가 담고 있는 의미는 참사였다.

수색상황을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기자들을 태운 낚싯배가 침몰 지점 100m까지 접근하자 해경 쾌속정이 빠르게 접근해 "더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방송을 했다.

이어 1000t급은 됨직한 해군 순시선이 시선을 가로막았다.

침몰지점에서 200m까지 밀려난 낚싯배가 멈췄다. 사진기자들은 렌즈를 당겨 수색상황을 촬영했다. 예상보다 바다는 잔잔했다. 섬과 섬 사이 좁은 수로에서 급박했던 파도는 이곳에서 진정됐다.

선장은 "조금때니까 (실종자를)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며칠있다 사리가 오면 수색작업을 할 수 없다.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배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탁했다. 집어등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파도는 높지 않았지만 바람이 거세 체감온도는 영하였다. 덜덜 떨면서 사진기자들은 셔터를 눌렀다.

오징어잡이배 10여척에서 켠 집어등이 출렁이는 파도에 반사되면서 절로 눈이 감겼다.

'저 아래에, 여기보다 훨씬 추운 곳에 수백명의 아이들이 아직 있구나', 생각하자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이날 낚싯배에는 뉴시스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 기자외에도 AP, AFP, 로이터 등 해외 뉴스통신사 기자들이 자리해 이번 사고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을 대변했다.

영상촬영을 위해 진도를 찾았다는 AP통신의 라울 갈레고 아벨란 기자는 "침몰하기까지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라며 "나 같으면 바로 아이들에게 '빨리 나와라'해서 모두 탈출시켰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를 비롯한 해외 뉴스통신사 기자들은 사고해역 현장이 담긴 사진과 영상으로 실시간 타전했다.

오후 8시3께 집어등이 켜졌음에도 바다는 점점 칠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수색작업이 더뎌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군용기에서 조명탄 4발을 사고해역 상공에 투하한 것이다. 비행기는 주위를 선회하면서 5분마다 4발을 투하했다.

섬과 섬을 건너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은 점멸하는 조명탄으로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무수히 쏟아지는 조명탄은 주변에 떠있는 배들의 이름을 선명하게 했다.

'KOREA COAST GUARD', '기상청 기상 1호', '독도함', '다도함' 등 정부를 대표하는 최신형 배가 집결해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단 한명의 생존자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선장은 말했다.

"내가 근처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0시인가 사고해역에 도착했지. 그때는 이미 선수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어. 그때가 사리(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작은 때)였잖아."

이곳 물살을 잘 알고 있던 그는 큰 참사가 나겠다고 직감했단다.

생각해보니 그 시각은 중앙재잔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단 1명의 인명피해도 없도록 최선 다하라"고 지시한 때였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적절했다고 보냐고 묻자 선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거센 조류 탓에 물밑 수색작업을 이날 오후 8시께 잠정중단했다. 한번에 4발씩 쏴대는 조명탄만이 캄캄한 밤하늘을 별 대신 밝히고 있었다.

배는 오후 8시23분께 사고해역을 벗어나 팽목항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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