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2013제주희망콘서트' 두번째 주자 손학규 초청
"운동권에서 민자당 입당, 민주통합당에서 대선출마까지 내 행보의 기준은 분명했다"

▲ 30일 ‘2013제주희망콘서트’ 두 번째 주자로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가 초청됐다. 이날 사회는 이재홍 제주의소리 편집국장과 프리랜서 성우 김정수씨가 맡았다. 김정수씨는 현재 제주중앙지하상가가 처음 도입한 상가 라디오방송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문정임 기자

▲ 손 후보가 그간 자신이 걸어온 행적과 앞으로의 대한민국 정책 발전 구상을 제주도민들 앞에서 밝히고 있다. 이날 행사는 오후 7시 제주웰컴센터에서 열렸다. 문정임 기자.

[제주도민일보 문정임 기자] 대학시절 몇 차례 무기정학을 당한 운동권에서 1990년대 김영삼의 품에 안기며 얻은 ‘변절자’ 낙인에 대해, 손학규(64)는 당시의 ‘개혁 열풍’에서 해명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1993년 경기도 광명지역 보궐선거에 민주자유당으로 출마하며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 그때가 4월인데, 김영삼 대통령 당선이후 ‘하나회(1963년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이 주도해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를 없앤다’ ‘인왕산을 개방한다’ ‘안가를 없앤다’는 등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개혁 분위기가 정치권 전반에 불어닥쳤다”며 “이 정도의 개혁이라면 ‘참여해도 될 것’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손 고문은 “그로부터 3~4년 후 YS 기운이 빠지면서 민자당이 다시 구 민정당의 분위기에 휩쓸려갔지만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늘 개혁을 이야기했고 개혁을 판단의 중심에 뒀다. 한나라당에 있으면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햇빛정책을 지지한 것이 그 예”라고 단호히 말했다.

지난 30일 ‘2013제주희망콘서트’ 두 번째 주자로 손학규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 후보가 초청됐다.

손 후보는 앞서 지난 22일 제주를 방문해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장을 만난 데 이어, 콘서트 하루전인 지난 29일 일치감치 제주를 찾아 올레 길을 걷고 강정마을을 방문하는 등의 일정을 진행했다.

이날 희망콘서트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대목은 변절자 낙인에 대한 손(孫)의 해명이었다.

손학규는 대학시절 빈민 노동자의 삶에 깊은 관심을 뒀다. 소위 운동권이었다. 여러차례 무기정학 등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손 후보가 이날 “어머니가 수배 받는 나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정말 ‘빨갱이’로 오해하신 것은 아닌지 늘 마음이 쓰인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 손학규는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 외에도, 노동자라는 이름조차 없던 ‘여공’들의 비참한 삶에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영국 유학후 돌아온 그가 당적을 둔 곳은 새누리당의 전신 민자당이었다. 의외였다. 세간에서는 그를 두고 ‘변절자’라고 말했다. 민자당 속에서 손 후보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국회의원을 네 차례 지냈고 장관과 도지사도 각각 한 차례씩 지냈다. 이어 2007년. 다시 그는 한나라당을 나와 민주통합당 창당에 힘을 싣고 대선 출마 움직임을 시작했다. 다시 일각에서는 ‘정치철새’라고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 손학규는 “YS정부 초기에는 정치권의 변화 의지가 워낙 강해 합류할 수 있었고, 이후 한나라당을 나온 것은 이제 새 길을 가야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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