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단체들] 변신 국면 맞닥뜨린 민예총
“민족운동의 시효는 끝났고 민예총은 변화의 시기를 놓쳤다?"

시민사회단체가 위기다.

1980~199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절정기를 지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부 단체들은 정체성 위기와 운영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기초적인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개인주의가 확산되면서 공동의 선과 이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식은 것이 첫째 이유다.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면서, 경제는 발전했으되 먹고사는 문제가 더 치열하고 중요하고 어려워진 탓도 있다. 사람들은 성공과 여가, 자연친화적인 개인의 삶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일부 단체들은 자신들이 내건 정체성이 더 이상 시민들의 품을 헤집고 들어가지 못 하는 현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거나 쇠퇴의 길을 서성이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 민예총의 변신

대표적인 예가 민예총이다.

지난 12일 제주민예총(㈔제주민족예술인총연합, 지회장 박경훈)은 의미있는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만남의 골자는 7·9·10월 매주 주말 산지천 일대에서 길거리 공연 형식으로 ‘제주자청비데이 프린지 페스티벌’을 열겠다는 것. 정형화된 무대를 벗어나 삼삼오오 벌어지는 공연으로 구도심 활성화와 신인 발굴 기회를 동시에 거머쥐겠다는 내용이었다.

민예총은 또 길거리 전시와 아트마켓·이동서점·주변 상가와의 할인 행사를 진행, 시민들이 예술을 매개로 즐길 수 있는 여러 꺼리들을 만들어주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박경훈 지회장은 “보헤미안의 도시 제주에 굉장히 어울리는 행사”라며 “시민과 예술인이 가까이서 마주한다는 의미와 함께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전혀 새로운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새로운 것은, 민예총이 변신의 첫 발을 디뎠다는 데 있었다.

‘제주자청비데이 프린지 페스티벌’은 제주민예총이 4.3 등 민중적이고 사회·역사적인 소재에 갇혀 있다는 비난을 벗어나자는 취지로 처음 선보인 행사다.

박 지회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예총, 민예총의 고민이 ‘고루하다’는 지적이다. 매년 연례행사만을 진행하는 기성 예술집단으로 안착, 점차 ‘꼰대’(늙은이나 교사를 이르는 은어)가 되고 있다”며 “새로운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어왔다”고 말했다. 박 지회장은 또, “지회장이 돼 조직을 끌어가려고 보니 사람을 키워내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민예총 사람’을 만드는 데 소홀했던 것 같다”고 그간의 반성을 내보였다.

◈ 민예총의 메시지 1- 탐라입춘굿놀이

그간 제주민예총은 탐라입춘굿놀이와 4·3문화예술축전을 정기적으로 열어왔다. 입춘때 열리는 탐라입춘굿놀이는 탐라국시대부터 전승되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된 것을 1999년 문무병씨가 복원, 제주민예총이 매년 치르고 있다.

낭쉐몰이와 제주형 탈굿놀이의 복원은, 고증에 대한 질타를 떠나, 제주 문화계에 의미있는 시도였다. 반면 시민들의 관심이 적어 ‘대중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탐라입춘굿놀이는 도시축제로 갈 것인지 문화재화할 것인지 비전과 방향이 모호하다.

박 지회장은 올 초 취임을 즈음해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탐라입춘굿놀이가 한국 유일의 입춘축제임에도 사람들은 중요성을 모른다”며 “문화재로 갈 것인지 현대성을 가미한 도시축제로 갈 것인지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라고 화두를 던진 바 있다.

매년 탐라입춘굿놀이가 끝난 뒤에는 관객이 적었다는 아쉬운 평가가 뒤따른다. “추운 날 입춘굿놀이를 보려 관덕정 일대를 찾는 사람이 적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평가가 있지만 사람을 끌어들일 묘안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는 “모든 행사에 사람이 많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며 “오히려 대중성 확보보다 고증성 확대에 더 심혈을 기울여 보전과 복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방향을 잡고 그에 맞게 행정과 단체가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다. 

◈ 민예총의 메시지 2- 4.3문화예술축전

4.3문화예술축전(종전 4.3예술제)도 점차 쇠해지는 느낌이다.

역사와 민중을 중시하는 민예총에게 4·3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과제. 민예총은 4.3의 아픔과 역사적 의미를 후세대가 잊지 않도록 1994년부터 미술전과 사진전·음악제·마당극제·문학제·다큐영화제, 그리고 찾아가는 위령제 등을 매년 4.3을 즈음해 열고 있다.

▲ 1994년 4월3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제주민예총의 제1회 4.3예술제 모습.

하지만 4.3문화예술축전은 뜻 깊은 행사의 의미에도 불구, 매년 비슷비슷한 구성으로 시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는 행사를 꾸리는 주최측이 더 잘 알고 있다.

4.3문화예술축전에서 미술제를 맡는 민예총 소속 탐라미술인협회는 지난해 미술제없이 산전제와 토론회만으로 행사를 꾸렸다.

4.3문화예술축전에서 작품 전시없이 보낸 해는 지난해가 처음. 회원들은 앞서 지난 1993년 겨울, 출발을알리려 찾았던 이덕구 산전을 18년만에 다시 찾아 4·3문화예술축전(미술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 2011년 4월2일 오전, 제주민예총 산하 탐미협 회원들이 이덕구 산전을 찾아 제를 올렸다. 제주도민일보 자료사진.

당시 산전제(이덕구 산전)에서 만난 송맹석 탐미협 회장은 “반성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단체는 분명 여타 미술인단체와 다른 정체성이 있는데, 4월 행사만 끝나면 흩어졌다가 1년뒤 4월에 다시 만나 행사를 잠깐 치르고 헤어지는 등, 의례적으로 임해온 부분이 있었다. 도민들에게 더 쉽고 깊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라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 민예총 전체의 고민 “민족운동의 시효는 끝났고 민예총은 변화의 시기를 놓쳤다?”

그러나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는 느낌은, 제주민예총만의 고민이 아니다.

지난 2010년 12월 ㈔제주민족예술인총연합 사무실에서는 민예총 전국지회 관계자들이 모여 민예총의 변화의 방향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진행했다.

▲ 2010년 12월, 제주민예총 사무실에서 열린 민예총 전국지회 정체성 토론의 장. 제주도민일보 자료사진.

민예총은 1988년 출범 이후 ‘민주화를 위한 문화예술운동의 대중화와 통일을 향한 민족예술인의 구심’을 표방해왔다. 늘 사회적 이슈에 의견을 내고 동참하며 어느 문화예술단체보다 시민들 가까이에 있었지만 창립후 53개의 지회와 지부로 확대되는 동안 한국의 사회 상황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 이사장 등 관계자가 정부보조금 횡령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으며 조직의 존폐·운영 목적 등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계속돼 왔다.

당시 전북지회 관계자는 “민예총이 목표한 것이 이뤄졌느냐에 따라 민예총의 존재여부가 논의돼야 한다”며 “민예총에는 분명한 개념어가 없다. 이미 해체된 것을 붙잡고 있는 것 아니냐”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이 관계자는 “민족운동의 시효는 끝났고 민예총은 변화의 시기를 놓쳤다”며 명칭 변경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해체론을 못 박는 한편, 대안으로 민예총은 이제 예술이 가지는 사적영역에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수술론을 펼친 셈이다.

박경훈 제주민예총 지회장(당시 부지회장)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박 지회장은 “창립후 전국의 지회가 함께 추진한 일이 없었다. 일거리가 없다보니 그저 소식을 전하는 친목단체에 불과했다”며 “모여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있은 후 명칭을 바꾸든 조직을 해체하든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경기지회 관계자는 “민예총 이름은 그대로 가되, 보다 실질적인 자리찾기 고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관계자는 경기지회의 경우 “지역 시민단체들과 선거때 ‘좋은후보 지지하기’를 시행하고 당선된 후보에게는 의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며 “명칭을 바꾼다고 면피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간 민예총이 민주화투쟁전선에서 예술을 해왔다면 이제는 생활로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또, 한국민족서예인협회 관계자는 “‘민족’이란 말 자체보단 조직자체의 비자립성이 더 문제”라며 “자립을 못 하니 돈에 기대게 되고 돈이 없으니 행사를 못해 조직간 만남의 자리가 적고 젊은 피가 수혈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악순환되고 있다”고 말했다.

# 새로운 전선 준비하고 있나

문화예술의 역할 중 하나가 ‘공동체에의 참여’라고 봤을 때, 민중의 아픔 4.3과 함께하고 제주해군기지 등 지역적 이슈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민예총의 행보는 고맙기까지하다.

그러나 가치있는 주제를 가지고도 ‘그들만의 리그’에 갇히거나, 현실(시민들의 관심사, 공감대)과 괴리된 단어를 계속해 표방하는 것은 스스로가 고립을 자초하고 움직임에 효율과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다.

‘명칭을 바꾸자’ ‘시민들의 생활로 들어가자’ ‘금전적으로 자립하자’ ‘예술이 가지는 사적 영역에 몰두하자’는 등의 앞선 전국 민예총의 공통된 ‘자리찾기’ 고민은 결국 민예총이 해체되지 않는 한 각 지회의 고유의 몫으로 남겨진다.

제주민예총이 새로운 출발선에 서고 있다.

지난 4월, 20년간 가져온 조직명칭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제주도지회'에서 '㈔제주민족예술인총연합'으로 바꾸고 지난달 독립을 알리는 출범식을 가졌다. 

오는 21일 민예총이 새롭게 꺼내 든 프로젝트 문화사업 ‘제주자청비데이 프린지 페스티벌’이 시작된다.

박경훈 지회장은 이번 민예총의 위기에 대한 취재와 관련, “그간 민예총이 지역의 투쟁과 4.3의 해결에 관심을 두며 딱딱한 활동을 이어왔다면 이제는 메시지를 주는 예술에서 마사지하는 예술(마셜 맥클루언이 ‘미디어는 마사지다’라고 말한 것 차용)로 활동영역을 풍부하게 가져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루탄 냄새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거리를 가득 메우던 1990년대, 예술로서 민족문화 창달에 기수가 됐던 이들이 이제 또다른 방향성 찾기에 나섰다.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제주민예총의 행보에 관심과 애정어린 눈길이 쏟아지고 있다.
 

▲ 1988년 11월25일자 한겨레신문 민예총 출범 기사.

초기, 자유로운 예술창조를 가로막는 각종 예술 악법의 철폐와 예술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내걸고 재야 비판세력으로 주로 활동,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약칭 예총)와 노선을 달리했다.

1993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했으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제도권 안으로 진출했다. 경기·인천·부산 등 53개의 지부와 지회를 갖고 있다. 

한편 제주민예총은 1994년 2월 창립, 첫해 제1회 4.3예술제를 치르며 도민들과 만났다. 제주민예총은지난 6월15일 제주도문예회관에서 출범식을 열고 제주지역법인체로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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