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상이 / 제주대학교 의료관리학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 이상이

몸이 많이 아파서 종합병원에 가본 사람들은 대개 다음의 두 가지를 느끼게 된다. 하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위축시키는 고약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눈앞의 의사가 너무나 커 보이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심리적 주종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료비 명세서를 받아 본 순간에 느끼는 것인데, 비록 부족하긴 해도 국민건강보험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첫번째 느낌은 의사-환자 관계에서 치료의 순응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의 느낌인 공적 의료보장제도에 대한 고마움이 값비싼 진료비에 대한 공포와 절망으로 바뀐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시점에서 환자가 지불할 진료비의 부담이 엄청나게 크다면 첫 번째의 의사-환자 관계도 왜곡되고 만다. 질병을 치료해준 병원과 의사에 대한 고마움의 감정보다는 경제적 공포와 함께 이들에 대한 불신이 압도적으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국이 그렇다. 미국은 노인과 극빈층을 위한 공적의료보장제도인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제외하면 전체 국민의 약 70%가 각자 알아서 자신의 의료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나라다. 결국 이들은 모두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그러나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평균 150만 원에 달하는 값비싼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기 어렵다. 그래서 미국인의 17%인 약 5000만명은 의료보험이 없다. 이 사람들은 아파도 병원에 못 간다. 미국의 의료비는 우리나라의 약 5∼6배로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일찍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픈 국민이 병원에도 못 가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미국 국민의 이러한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정치적 명운을 걸고 건강보험개혁법을 입법했다.

오바마는 온 국민을 하나의 공적의료보험에 가입토록 하는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제도와 같은 공적 단일보험자 방식을 가장 선호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공적 의료보험이라곤 하나도 없고, 이미 민간의료보험이 대세인 미국에서는 이러한 공적 단일보험자 방식이 불가능함을 알고, 대신에 선택사항으로 수많은 민간의료보험들과 경쟁할 수 있는 공보험을 하나라도 도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미 의회에서 공화당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되었고, 정치적 협상과 절충 끝에 결국 ‘모든 미국인이 민간의료보험에 강제 가입’하도록 하는 내용의 건강보험개혁법을 입법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향후 연방정부의 엄청난 재정투입이 예상되어 있는데, 10년 간 우리 돈으로 약 1000조원을 투입해야 한다.

건강보험개혁법 입법에 대해 추가적인 세금부담을 우려한 중산층들과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공화당 및 보수주의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보수적인 시민운동단체인 티파티는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고, 이는 지난 총선에서 공화당의 승리로 연결되기도 했다. 결국, 오바마의 건강보험개혁법에 반대하는 소송이 미국 각지(26개 주)에서 제기됐고, 미국 연방대법원이 본안을 다루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6월28일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오바마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관 5대 4의 승리였다. “전 국민 의무가입 조항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 위헌을 제소한 보수파의 의견이었고, 이는 사실 ‘자유주의 전통이 매우 강력한’ 미국에서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견해였다. 그래서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연방대법원이 건강보험개혁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릴 것으로 전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픈 사람들이 병원에도 못 가는 미국의 처참한 의료 환경과 매년 압도적으로 치솟는 세계 최고의 국민의료비 현실이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이 예상보다 전향적인 판결을 내리게 한 배경의 하나가 된 것 같다. 이는 최근 60년 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 중 가장 중요한 결정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복지국가의 의료보장제도’라는 세계적인 틀에서 보면, 미국의 이러한 의료보장 개혁 노력과 성공은 정말 작은 성과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유지상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마침내 사회권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조짐이 의료보장 분야에서 미미하게나마 그 싹을 틔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낸 오바마 정부와 미국 국민들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얼마나 다행인가. 누가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의료보장제도는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럽 복지국가들에 비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사실상의 무상의료’를 향한 의료제도 개혁의 고삐를 바짝 당겨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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