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일보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데스크논단
어떵 해시민 조쿠과?[칼럼] 조영배 /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교수
▲ 조영배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 속에 잔잔한 떨림이 스며있음을 직감했다. ‘죽어부러수다. 가부런 마씸.’ 친구의 죽음을 전하는 전화기 너머의 친구 부인의 목소리는 곧 북받치는 울음을 쏟아낼 것 같았다. 잔잔한 목소리에 깔려있는 두려움과 슬픔과 안타까움과 괴로움은 차라리 울부짖는 울음으로 죽음을 알리는 목소리보다도 더 처절했다. 필자의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소리도 콱 막혀왔다.

하루 전날, 병원을 찾아 친구의 손을 잡고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암 투병으로 지칠 대로 지쳐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가슴이 아팠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포기한다는 말은 하지 말자’고 했던 나의 말이, 부고 전화를 받고나니 너무나 초라한 가벼움으로 흐늘거렸다. 고통스러워하는 친구의 손을 붙잡고, 제발 고통을 줄여달라고 기도했던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인가? 한 달은 버틸 줄 알았는데, 하룻밤을 넘기자 친구는 모든 고통을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나갔다.

친구 부인은 슬픔을 간신히 참으며, ‘어떵 해시민 조쿠과?’하고 물어온다. 장례예식에 대한 의논이었다. 친구 부부는 최근 기독교에 귀의해 육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심적으로나 영적으로는 많은 위로와 평안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귀의에 도움을 준 필자에게 의논했던 것이다.

망자와 부인이 기독교에 귀의했지만, 친척들은 여전히 기독교 예식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의 잘못인가? 그러나 그들의 잘못만은 결코 아니다. 그 동안 폐쇄적이며 독선적인 행태를 보여 온 개신교의 잘못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따르는 종교다. 그런데 예수는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신앙을 가장 멀리했고, 강력하게 질책했다. 때문에 자신들만 구원받는다고 안하무인격으로 떠드는 배타적인 기독교인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예수를 ‘엉터리’로 믿는 자들이 된다.

그래서 필자는 친구 친척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이 있었다면, 그 동안 콱 닫힌 잘못된 기독교 때문에, ‘열려 있는 아름다운 기독교 신앙’마저도 함께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친구 부인에게 ‘상주와 형제간에 서로 의논해 합의된 예식절차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불교식이면 어떻고, 기독교식이면 어떠냐고도 했다. 죽은 자의 안식을 빌고, 산 자를 위로하는 진정성이 중요한 것이라고도 했다.

필자는 ‘오직 이것만이 옳다. 저것은 절대 안 된다’는 식의 사고에 강한 저항감을 느낀다. 그런데 한국의 대부분의 개신교가 바로 이런 행태를 보여 왔다. 기독교를 믿는 필자가 보기에도 한국 개신교는 철저히 신과 사람들 앞에 그들의 독선적인 잘못을 고백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런 ‘엉터리 기독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건전한 종교라면, 그 어떤 종교도 배타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불교예식이 훌륭한 예식이듯이, 기독교 예식도 훌륭한 예식이며, 이슬람 예식도 훌륭한 예식이다. 문제는 어느 종교가 되었든 간에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식의 ‘독선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발생한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들의 저변에는 바로 이러한 ‘배타적 독선’이 깔려 있다. ‘배타적 독선’이라는 놈은 자기 집착과 욕심이라는 독을 먹고 산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삶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모습을 보면 못 견뎌 한다. 강제로라도 자기들처럼 만들어야만 만족해한다. 때문에 이 ‘배타적 독선’이라는 놈은 갈등과 싸움과 죽음을 항상 몰고 다닌다.

강정 땅에도 이놈은 서슬 시퍼렇게 싸돌아다니고 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고개를 내밀어, 싸움질을 부추기고, 죽음의 길로 사람들을 몰아간다. ‘배타적 독선’이 더욱 무서운 것은, 이놈은 또 다른 ‘배타적 독선’을 계속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강정 땅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도 ‘해군기지 찬성이라는 배타적 독선’이 끊임없이 독선의 독선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리를 끊기가 정말 힘들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기’를 하려는 열린 사고가 그래서 더욱 필요한 요즘이다.

통화를 마친 필자는 하늘로 간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잘 올라갔냐? 거긴 어떠냐? 여전히 다른 생각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이곳을 보면 가슴 아프지? 어이 친구야. 아마 거기는 불교도 없고 기독교도 없고 이슬람도 없을 게다. 그냥 빙긋이 웃으며 편히 쉬거라. 자네가 부탁한 것은 잊지 않을게.’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조영배  wabora2002@yahoo.co.kr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