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혜경 / 아트스페이스C 대표

▲ 안혜경

지난주에 시댁 어른의 이장을 하게 되었다. 햇빛 넉넉한 오전, 숲이 울창한 소로를 걷고 하천도 건너 다다른 무덤은 새소리만 가끔 들리는 작은 숲으로 둘러싸인 양지 바른 얕으막한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이장을 위해 무덤을 파내니 61년 된 유골이 드러났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이었지만 그 분이 60여 년 전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마흔도 안 된 젊은 나이로 돌아가실 때의 안타까운 모정과 어여쁜 자녀들의 슬픔과 두려움이 연상되며 목이 잠기고 가슴이 아렸다.

시간적 차이나 개인적 관계성의 깊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죽음 앞에서는 생명에 대한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면서 얼마 전 봤던 정재은 감독의 ‘말하는 건축가’란 다큐멘터리 속 건축가 정기용이 남긴 삶의 궤적을 더욱 진지하게 반추해봤다.

기적의 도서관으로 잘 알려진 정기용건축가가 작년 돌아가셨을 때, 개인적으로 특별한 친분은 없었지만 소중한 분을 또 한 분 잃었다는 슬픔으로 마음이 아렸다. 그가 무주군 안성면 사무소 건축을 의뢰받았을 때, 그 마을 어르신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봤다고 한다. 한 달에 한번 미니버스를 타고 목욕 다녀오시던 그 곳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진짜 필요한데 정말 지어줄 수 있냐’던 대중목욕탕을 면사무소에 만들어드린 일화는 정말 감동적인 공공건축 프로젝트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그 분은 제주4·3평화공원 1차 설계공모의 문제점을 소상하게 유족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쪼개 제주에 다녀간 적도 있다.

그에 관한 정재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 그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 일민미술관에서 있었던 그의 개인전 ‘감응, 풍토, 풍경과의 대화’를 준비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그의 세계를 대면하게 됐다. 그의 건축에서는 경제성이나 미학적 탐닉이 제일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연 등 삶의 환경이 그의 건축을 그리는 함수의 좌표였고 그런 그의 건축함수는 그의 인생관을 반영한 것이다.

논이 있는 시골 풍경 안으로 조용히 스미는 집. 그가 그 집을 찾아가 ‘이 곳에선 일어서면 논이 따라 일어나고 앉으면 따라 앉는다’며 빛이 간접적으로 비쳐드는 마루 의자에 앉아 “이 곳은 시간이 머무는 집이다. 도시에는 시간이 다 도망가 버리는데.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고, 자연이 있는 집. 도시는 감히 감각할 수 없는 것이 은근히 스며든다”며 애정어린 시선으로 말한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뛰거나 엎어져 자연광 밑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 기적의 도서관 건물들도 인상적이었는데, 커다란 건물들을 설계한 그가 노란 저녁 빛이 가늘게 두 줄기 조명처럼 골방으로부터 자신의 발로 비쳐드는 자신의 작은 아파트(임대료를 지불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건축은 뭔지, 도시는 뭔지, 근원적인 문제를 다시 곱씹어 보고 생각해보고 그러면서 좀 더 성숙한 다음에 죽는 게 좋겠다. 한 마디로 위엄이 있어야 되는데…. 밝은 눈빛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죽음과 마주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고 쉰 목소리로 가만히 얘기하는 그의 잠긴 목소리가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가 말한다. “문제는 이 땅에 있고 해법도 이 땅에 있다.”
그렇다. 삶과 죽음의 자연스러운 순환을 조화로운 공간 안에서 자연의 질서와 속도로 느끼는 것이 만일 사치라면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기계의 속도로만 느껴야 한다는 강제에서는 벗어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봄내음이 맡고 싶고 움직이는 하늘을 감상하고 싶다며 그가 세상과 작별하기 얼마 전, 이동 침대로 그가 식구처럼 함께 지내온 기용건축 사무실 직원들과 야외에 나가 “여러분 고맙습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너무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는데. 이 순간에도 개발논리로 끝없이 자동차 중심의 도로를 만들며 이곳저곳 파헤쳐져 우리들 오랜 삶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사라져가는 제주를 떠올리며 더욱 그를 잃어버린 우리의 상실이 안타까워 가슴이 먹먹했다. 죽음을 대하며 망인들이 남긴 삶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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